1. 가치 생산의 전환: 크리에이터는 노동자인가 자본가인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즉,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이 생산되는 데 소요된 평균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 가치가 노동자에게 온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잉여가치, 즉 생산된 가치에서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제외한 차익은 자본가의 몫이 된다. 이 구조는 착취의 원리다.
오늘날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에서 이 문제는 다시 부상한다. 유튜버, 틱톡커, 인스타그래머, 1인 뉴스레터 작가 등은 스스로 노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동시에, 상품(콘텐츠)을 생산하는 주체다. 그런데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본가일까, 아니면 여전히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자본에 종속된 노동자일까?
표면적으로는 크리에이터가 자율적인 생산자로 보인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며, 팬과 직접 소통하고, 광고 수익이나 구독을 통해 수익을 얻는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시각에서 보면 이 구조는 전혀 자율적이지 않다. 플랫폼은 크리에이터가 만든 가치의 흐름을 통제하며,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 광고 단가, 수익 분배 정책 등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
즉, 콘텐츠라는 ‘상품’은 크리에이터가 만들지만, 그 가치를 실현하고 교환하는 시장은 플랫폼의 통제 하에 있으며, 크리에이터는 실제로 자기 노동의 전부를 소유하지 못한다.
이것은 ‘디지털 봉건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플랫폼은 영지처럼 작동하고, 크리에이터는 알고리즘이라는 영주의 명령에 맞춰 콘텐츠를 제공해야 하는 디지털 농노가 된다. 노동은 자율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잉여가치를 소유할 수 없는 새로운 노동 소외 구조에 갇힌 것이다. 마르크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플랫폼은 노동수단이자 착취의 장치다.
2. 상품화된 자아: 콘텐츠 속 ‘자기’는 누구의 것인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 수단으로 전락하며, 점차 자기 노동과 소외된다고 말한다. 이때의 소외는 단순히 ‘회사에 지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핵심인 노동력과 생산물, 인간관계, 자기 자신과의 분리다.
이 개념은 오늘날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자기 상품화(self-commodification)’ 현상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크리에이터는 단순히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일상·정체성·감정·스토리 자체를 상품화한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노출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율적 자아의 표현이 플랫폼 논리에 의해 필터링된다는 점이다. 어떤 콘텐츠가 더 도달률이 높은지, 어떤 감정이 소비되기 쉬운지, 어떤 라이프스타일이 후원받기 적합한지에 따라 크리에이터는 자신의 표현조차 전략화해야 한다.
결국 자기표현은 ‘진짜 나’가 아니라, 시장에 잘 맞는 자아의 가면이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 소외의 현대적 모습이다.
게다가 이 ‘자기’는 멈추지 않는다. 콘텐츠는 매일 업데이트되어야 하고, 사적인 삶과 공적인 정체성은 분리될 틈이 없다. 노동과 쉼, 자아와 상품, 삶과 수익이 완전히 융합된 상태에서, 크리에이터는 종종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진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생산 수단의 부속물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오늘날 크리에이터는 콘텐츠 생산 기계의 일부가 된 채, 자기 자신을 브랜딩하는 생산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구조에서 자아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클릭 가능한 노동력’으로 환원된 소외된 형상이다.
3.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 플랫폼 자본주의의 기계적 규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축적과 재생산이 자동화된 규율 속에서 작동한다고 보았다. 시장은 개인의 윤리나 감정과 무관하게 ‘자본의 자기 운동’을 추동하고, 이 흐름에 편입된 노동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자기를 반복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이 구조는 오늘날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에서도 놀랍도록 유사하게 작동한다. 알고리즘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자, 플랫폼 자본주의의 기계적 심장이다.
크리에이터는 팬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콘텐츠를 만들며, 자신의 감정이나 철학이 아니라, 노출 빈도와 도달률, 클릭률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는 점점 더 자극적, 단순화되고, 일정한 트렌드에 따라 쏠림 현상을 보이며, 크리에이터의 창작력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데이터 피드백 시스템에 종속된 형태로 진화한다.
마르크스가 경고한 자본의 추상화된 운동, 즉, 인간적 목적과 무관한 축적 시스템은 알고리즘이라는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플랫폼은 크리에이터가 만든 ‘상품’을 평가하고 필터링하며, 노출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사실상 결정짓는 초월적 위치에 오른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편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율적 생산자인 듯 보이는 크리에이터를 사실상 ‘디지털 노동 기계’로 조율하는 자본의 통제 장치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크리에이터는 자율적 개인인가, 아니면 자기감정조차 알고리즘에 맞춰 최적화된, 고도로 자동화된 노동자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사회적 고민이 아니라,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생산관계’ 재정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관계 속에 살고 있다.
4. 크리에이터의 해방은 가능한가: 연대, 협동, 그리고 자율의 윤리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결론에서 노동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착취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목적과 성과를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 상승’이나 ‘휴게 시간 보장’ 같은 단기적 개선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와 운영 권한을 전환하는 구조적 전복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오늘날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는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분명 플랫폼은 자본이자 통제 구조다. 하지만 동시에,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는 노동이 중앙화되지 않고 분산되어 있으며, 수많은 개인이 작은 공동체, 팬덤, 협동 조합적 구조를 통해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다.
크리에이터들이 자율적 플랫폼을 만들고, 자체 구독 기반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탈중앙화된 창작자 생태계를 구축하는 움직임은 자본의 절대 지배에 대한 실질적 대안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꿈꾼 해방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 가치 실현의 모든 과정에서 자기 권한을 되찾는 것이다. 크리에이터가 자기 콘텐츠의 가격을 정하고, 유통 구조를 통제하며, 팬과 직접 계약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그는 ‘상품’이 아니라 ‘주체’로 다시 설 수 있다.
이것은 ‘1인 크리에이터’의 개인적 성공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노동 연대와 공유 질서가 등장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진짜 혁신은 더 많은 조회수, 더 강한 브랜딩이 아니라, 생산 수단을 누구의 손에 둘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전환에서 시작된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말했던 그 순간처럼, 지금의 디지털 노동자 역시, 기술과 감정의 도구가 아닌, 삶의 주체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루타르크'와 리더의 휴식법 (0) | 2025.05.07 |
---|---|
'에밀'과 비대면 교육의 진화: 자연에서 알고리즘으로 (0) | 2025.05.06 |
'로크'의 자유론과 원격 근무의 철학 (0) | 2025.05.06 |
'몽테뉴'의 수상록과 나만의 콘텐츠 만들기 (0) | 2025.05.05 |
'질서의 기원(헤로도토스)'로 본 글로벌 커넥션 (1) | 2025.05.04 |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리스킬링 트렌드 (0) | 2025.05.04 |
'루크레티우스'와 기후위기 시대 생존 철학 (0) | 2025.05.03 |
'키케로'와 슬로우 리빙: 느리게 사는 기술 (5) | 2025.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