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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키케로'와 슬로우 리빙: 느리게 사는 기술

by lee-niceguy 2025. 5. 3.

1. 속도가 아니라 품격: 키케로의 ‘삶의 형식’

 

'의무론'에서 키케로는 인간의 삶이 윤리적 판단과 실천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 모든 행동에는 품격(decorum)이라는 원리가 흐려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품격이란 단지 외양이나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이성과 외면의 행위가 일치하는 삶의 형식이다. 키케로에게 있어 ‘성공’이란 빠르고 화려한 결과가 아니라, 정제된 판단과 절도 있는 표현, 일관된 삶의 태도 속에서 서서히 축적되는 명예로운 삶이었다. 그는 로마의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제나 속도가 아니라 품질, 다다름이 아니라 조화였다.

 

이러한 키케로의 철학은 현대 사회의 속도 중독적 삶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지금 효율, 다중처리, 일정 관리라는 이름 아래 자기 삶의 리듬을 외부 시스템에 완전히 위탁하고 있다. 아침은 빠르게 흘러가고, 점심은 간소하게 지나가며, 저녁은 피로에 짓눌린 채 마감된다. 그러나 그 속도는 정말 우리 자신의 것일까? 키케로는 경고한다. “가장 나쁜 속도는, 그것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을 때 생긴다.” 이는 마치 슬로우 리빙이 제안하는 ‘속도의 자기 결정권’과도 맞닿아 있다.

 

슬로우 리빙은 단지 게으름이나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자기 손에 쥐겠다는 선언이며, 내면의 가치에 기반한 속도 재설정이다. 키케로가 강조한 ‘삶의 형식’이란, 일상의 모든 행위에 질서, 절도, 내적 이유가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곧 슬로우 리빙의 본질이기도 하다. 조용히 일어나는 아침, 한 문장을 곱씹으며 읽는 독서, 성급하지 않은 대화, 목적 없는 산책, 이 모든 것이 '느림'이라는 이름의 철학적 행위다.


키케로는 말한다. “서두르는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을 지나친다.”
오늘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삶의 속도와 무게를 자신의 손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고요한 능력이다.

 

'키케로'와 슬로우 리빙: 느리게 사는 기술

 

2. 관조의 시간: 사색 없는 삶은 위태롭다

 

'노년론'에서 키케로는 나이 듦을 단순한 신체적 쇠퇴가 아니라, 정신이 깊어지는 시기, 삶의 리듬이 관조와 성찰 중심으로 전환되는 자연스러운 시간으로 묘사한다. 그는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듯, 인생의 후반부는 조용한 기다림과 정리, 그리고 의미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키케로가 말하는 ‘관조(contemplatio)’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가 아니라, 속도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리는 고요한 사유의 힘이다. 이 철학은 단지 나이 든 이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과 소비의 사이클에 갇혀 '살아있다'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 현대인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회복의 열쇠다.

 

오늘날 우리는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끊임없는 업데이트, 스크롤, 노티피케이션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은 많고, 성찰은 없는 삶에 머물게 만든다. “계속해서 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키케로는 반대로 말한다. “가장 위대한 준비는, 가장 깊은 고요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슬로우 리빙이 지향하는 적극적 멈춤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언제 사색하는가? 언제 마지막으로, 무엇도 하지 않은 채 한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본 적이 있는가? 슬로우 리빙은 바쁜 일정을 중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사이에 의미의 침전지를 마련하라고 조언한다. 그것은 짧은 산책, 아날로그 독서, 손 글씨, 명상, 혹은 그냥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키케로에게 관조란, 삶의 외형을 떠나 정신의 중심축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우리도 다시 사색할 수 있어야 한다. 느리게 읽고,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관계 맺는 그 모든 행위 속에, 속도가 아니라 깊이로 살아가는 기술이 숨어 있다. 키케로는 말했다. “행동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색은 언제나 우리를 자신에게로 되돌려준다.”

그가 꿈꾼 삶은 ‘정지된 삶’이 아니라, 조율된 삶, ‘속도를 통제하는 삶’이었다.

 

3. 우정과 공존: 느림은 타인과의 조화를 부른다

 

'우정론'에서 키케로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유용성과 이해관계 너머의 차원에서 고찰한다. 그는 친구란 같은 사유의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시간을 견디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즉, 진정한 우정이란 급속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과 느린 신뢰의 쌓임 속에서만 도달 가능한 정서적 조화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관계의 깊이보다 연결의 개수를 중시하고, 대화의 품질보다 반응 속도를 먼저 생각하는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는 빠르게 맺고, 쉽게 닳고, 금방 소모되는 일회용 네트워크로 전락하고 있다.

 

슬로우 리빙은 이처럼 빠르고 얇은 관계 구조에 제동을 건다. 관계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리듬의 문제이며, 타인과의 정서적 공진(共振)은 기다림과 인내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철학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친구란 무엇인가? 바로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은 현대의 소음 가득한 인간관계에서 말보다 존재, 반응보다 여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진짜 친밀감은 조용한 신뢰에서 비롯되며,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도달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우정은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 그 자체를 확인하는 관계다. 키케로는 이를 위해 '도덕적 우정'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즉, 친구란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함께 사색할 수 있는 동반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의 속도를 늦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심리적 회복이 아니라, 이러한 관계의 품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슬로우 리빙은 개인의 건강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뢰 회복과 관계의 정화를 함께 요청한다. 우리가 빠르게 살수록, 진짜 관계는 더 멀어진다. 키케로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정은 고요한 강물처럼 깊어야 한다. 격동하는 바다처럼 요란한 것은 결코 진짜가 아니다.”

이 철학은 오늘날 관계의 피로감에 빠진 이들에게 느림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해독제를 제안한다.

 

4. 자연으로 돌아가는 용기: 키케로식 ‘기품 있는 느림’

 

'자연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에서 키케로는 인간이란 본래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과 일치를 이루는 삶이 곧 현명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을 단지 경외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삶을 조율하는 모델로 삼는다. “자연은 언제나 조화롭게 작동한다. 인간은 그 질서를 따라갈 때 평화를 얻는다.” 이 말은 기술적 시간에 지배당하는 현대의 삶에 가장 필요한 균형 감각이다. 우리는 알람과 캘린더, 스크롤과 시계 속에서 자연의 시간감각을 상실한 채, 스스로의 리듬마저 잃어버리고 있다.

 

슬로우 리빙은 단순히 속도를 늦추자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리듬을 내 삶에 다시 불러들이는 철학적 선언이다. 해가 지면 조용히 어두워지고, 계절이 바뀌면 음식과 옷을 바꾸고, 아침엔 햇살을 따라 일어나는 일상의 조정, 이러한 자연 친화적 삶의 태도 가야말로 키케로가 말한 ‘기품 있는 삶의 리듬’이다. 그는 삶을 구체적으로 조율하라고 가르친다. 대화의 템포, 독서의 호흡, 말의 길이, 글의 문장 구조까지 모두가 자연의 완급과 조화로부터 배워야 할 리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빠르게’를 외치며 앞서가는 삶을 추구하지만, 키케로는 ‘더 조화롭게’를 기준으로 삼았다.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생리적, 정서적 리듬이 조화될 때 비로소 삶은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 슬로우 리빙은 이 조화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자극과 경쟁의 세계에서 물러난 은둔이 아니라, 고요하지만 단단한 주체적 선택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연의 걸음에 맞추어 걷는다면,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라.” 이 문장은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금 삶의 속도를 정할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단지 템포를 늦추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세계의 일부이며, 어떤 흐름을 따라갈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디지만 가장 확실한 자유의 시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