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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루크레티우스'와 기후위기 시대 생존 철학

by lee-niceguy 2025. 5. 3.

1. 자연은 신이 아니다: 파괴의 시대, 새로운 경외의 시작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에서 에피쿠로스의 세계관을 시의 언어로 풀어내며, 철저하게 신을 배제한 자연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자연을 인간의 감정이나 신의 의지로 해석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모든 존재는 원자와 공허(빈 공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이 관점은 당시 로마의 종교적, 신화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 구조이며, 인간은 그 안에 우연히 태어난 물질의 배열일 뿐이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있어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과 이성, 과학적 사유를 통해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인간에게 복수하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명료한 비 신화적 자연관은 오늘날 기후 위기의 문턱에서 전혀 새로운 경외감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연을 인간 중심의 서사 속에서만 이해해 왔다. ‘어머니 지구’, ‘회복력 있는 자연’, ‘인간의 안식처’라는 비유들은 결국 자연을 인간의 윤리적 맥락으로 환원시킨 시선이었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자연은 그러한 감정의 투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심하며, 그 무심함 속에서 절대적 중립성과 무자비한 질서를 갖는다. 기후 위기로 붕괴하는 생태계와 극단적 기상이변, 미세한 불균형으로 전체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자연은 분노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자연은 단지 반응할 뿐이다. 더 이상 인간을 중심에 둔 위로의 언어는 기후 위기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루크레티우스적 냉정함,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그 질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철학적 성숙이다. 우리는 이제 신을 믿지 않더라도, 자연 앞에 경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외는 두려움도 찬양도 아닌, 이해와 책임의 감정이다.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유산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명확한 사유다.

 

'루크레티우스'와 기후위기 시대 생존 철학

 

2. 욕망의 최소화: 생존의 철학적 재설계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에서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외부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잘못된 판단과 과도한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계승하여, 쾌락을 삶의 기준으로 삼되, 그 쾌락은 이성적으로 조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핵심은 ‘쾌락’ 자체가 아니라, 욕망을 선택하고 걸러낼 수 있는 정신의 힘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이가 진정 부유한 사람이다.” 이것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욕망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적 태도다.

 

오늘날 기후 위기를 초래한 문명의 구조는 무제한적인 욕망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다. 무한 성장, 과잉 생산, 과잉 소비, 끝없는 속도 추구, 이 모든 흐름은 인간이 가진 불안과 결핍 심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환상을 주입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결국 지속 가능성의 한계를 초과했고, 그 결과로 우리는 기후 위기, 생물다양성의 붕괴, 물 부족, 환경 난민이라는 위기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러한 현대의 구조를 예견하듯, 이미 2천 년 전 이렇게 말한다. “너는 지금 네게 필요한 것보다 열 배 많은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기후 위기 시대에 생존이란 단순히 ‘환경 보호’라는 도덕적 실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철학을 근본부터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 먹는 양, 이동 방식, 주거 공간의 크기, 이 모든 것을 줄이고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철학이 없다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생존은 요원하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에게 ‘덜 갖는 것이 더 많이 존재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급진적 전환의 사유를 제공한다.

 

현대의 슬로우 라이프 운동, 미니멀리즘, 로컬 푸드, 비건 실천, 탄소 중립 운동은 모두 루크레티우스적 철학의 현대적 재현이다. 그는 말한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를 줄일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 이 말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지구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쾌락을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쾌락을 선택하는 기준부터 다시 철학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욕망을 줄이는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장 의연한 저항이다.

 

3. 인간중심주의의 붕괴: 생태적 겸허함의 회복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통찰했다. 그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의 법칙 안에서 우연히 형성된 존재에 불과하다”고 쓴다. 이 말은 단지 철학적 충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설정하자는 선언이었다.

 

기후 위기의 시대는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철저히 해체시킨다.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는 도시들, 지구 평균 온도의 급격한 상승, 미세플라스틱으로 뒤덮인 해양 생태계는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일시적 착오 속에서 설계된 잠정적 존재다.


루크레티우스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우주의 질서에 대한 겸허함, 즉 ‘인간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려는 철학적 감각’을 강조했다. 이 겸허함은 오늘날 생태학적 태도의 기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 강해지기보다 더 작아지고 조화로워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중심의 효율과 통제를 넘어, 다른 생명과의 공존, 자연의 질서와의 공명 속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설계해야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네가 세계를 중심으로 바라볼수록, 그 세계는 너를 더 빨리 버릴 것이다.”
이제 생존은 정복이 아니라 위치 조정의 철학이다.

 

4. 죽음의 철학과 지구의 미래: 공포 없는 책임의 윤리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의 핵심 메시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감각도, 고통도, 기억도 없는 상태이기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신화와 종교가 만들어낸 가장 효과적인 지배 수단으로 보았고, 철학은 그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작업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지구 차원의 생태적 파국, 미래 세대의 삶의 조건이 파괴되는 느린 재앙의 죽음이다.

 

이 시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죽음 철학은 새로운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말에서 출발해, 죽음을 회피하기보다 책임을 자각하는 감정 윤리로 나아가야 한다. 즉, 생태적 붕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과 인식의 윤리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쾌락과 평온(ataraхia)을 삶의 목표로 보았다. 하지만 그 평온은 나만의 안온함이 아니라, 공포를 직면하고 철학적으로 숙성시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태도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담대한 이성이다.

 

우리는 종말을 두려워하는 대신, 종말을 사유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유가 다음 세대를 위한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을 초월하는 자만이 진정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기후 위기를 두려워하는 자에서, 그것을 마주하고 설계하는 자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루크레티우스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가장 실천적인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