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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으로 본 SNS 풍자

by lee-niceguy 2025. 5. 2.

1. 말의 물량전: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과 SNS의 언어 인플레이션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은 고대 희극 가운데에서도 언어의 기능적 해체와 지식의 조롱을 가장 강도 높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 희극에서 소피스트들은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기술'을 가르친다. 주인공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들을 철학 학교에 보내고, 거기서 배우는 것은 정의나 이성이 아니라, 말로 어떻게 상대를 이기고 법망을 빠져나갈 것인가에 대한 노하우다. 이 ‘구름 학교’는 결국 지식을 지혜가 아닌 기술로 전락시키는 공간이며, 말은 인간 이해의 도구가 아니라, 거짓을 포장하는 유희적 무기로 전락한다.

 

이 모습은 오늘날 SNS에서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SNS 플랫폼은 말의 정확성보다 반응성을, 진정성보다 확산 가능성을 우선한다. 게시물의 가치는 내용보다 클릭 수와 공유 수에 따라 평가되고, 말은 전달이 아닌 자기 포지셔닝과 감정 설계의 도구로 기능한다. 누군가는 한 문장을 써서 공감을 유도하고, 누군가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논란을 유도하며 주목을 끌어낸다. SNS의 언어는 더 이상 대화의 매개가 아니라, 시선 확보를 위한 전시물이 되었다.

 

특히 알고리즘은 언어를 ‘팔리는 말’과 ‘묻히는 말’로 분류하고,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은 그 논리에 맞춰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을 통해, 언어의 윤리적 기반이 무너지고, 지식이 패권화되며, 말의 소비가 진리보다 우선되는 사회의 위기를 풍자했다. 오늘의 SNS 역시 수많은 말이 넘쳐나지만, 진짜 대화는 사라지고 있다. ‘소통한다는 환상 속 말의 남용’, 이것이 '구름'과 SNS가 만나는 지점이다. 우리는 지금 구름 위에 떠도는 말의 세계 속에서, 진실 대신 장면을, 대화 대신 해시태그를 선택하고 있다.

 

2. 허공의 도시: '새'와 디지털 이상향의 붕괴

 

'새'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허영과 도피 심리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주인공 피세타이로스와 에우엘피데스는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권위, 전쟁, 불공정을 피해 새들의 왕국을 세우려 한다. 그들은 하늘에 ‘구름 둥지 도시’를 건설하며, 인간과 신의 세계를 중재하는 새로운 권력을 상상한다. 처음에는 이상적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도시는 또 하나의 권력 시스템으로 타락한다. 주인공은 처음엔 해방을 원했지만, 결국 새들을 지배하는 독재자적 존재로 변모하며, 이상향이 권력 환상으로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구조는 오늘날 SNS가 출발할 때 내걸었던 슬로건과 너무도 닮아 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광장”, “권력 없는 소통의 해방구”, “진정성 기반의 연결망” 이 말들은 마치 구름 둥지 도시의 설계도처럼 찬란했다. 하지만 SNS는 이제 계급화된 플랫폼이 되었다. 인플루언서는 제도 밖의 권력이 되었고, 팔로워 수는 신분처럼 작동하며, 알고리즘은 개인의 도달 가능성을 조정한다. 사용자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고 믿지만, 말이 도달하는 범위는 철저히 노출 우선순위와 상업적 논리에 따라 제한된다.

 

게다가 SNS 사용자들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면서도, 그 안에서 똑같이 권력 구조를 재현한다. 유명인에 대한 맹목적 추종, 영향력자 중심의 서열화, 댓글을 통한 여론 조작, 집단적 취향에 대한 동조 압력 등은 디지털 공간이 새로운 사회가 아닌, 기존 현실의 더 정교한 복제물임을 보여준다. '새'는 말한다. 인간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SNS의 ‘디지털 이상향’은 결국, ‘허공 위에 지은 환상’일 뿐이다. 진정한 해방은 공간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변화를 동반할 때만 가능하다. 그걸 놓치면, 구름 둥지 도시는 다시 또 하나의 감옥이 될 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으로 본 SNS 풍자

 

3. 말뿐인 평화: '리시스트라테'와 SNS 속 가짜 연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는 전쟁에 지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성 파업’을 단행한다는 과감한 설정의 희극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들은 성적 거부를 무기로 삼아 전쟁을 중단시키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집단행동의 허약함과 개인 욕망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겉으로는 공공의 정의를 외치지만, 내부에서는 참여자들이 사사로운 감정과 본능 앞에서 흔들린다. 리시스트라테가 고뇌하며 리더십을 발휘하려 할 때조차, 주변 여성들은 “그만 집에 가고 싶다”, “남편이 보고 싶다”며 투쟁을 포기하려 든다. 이 작품은 진심 없는 연대, 이해관계로만 결속된 저항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희극적으로 비판한다.

 

오늘날 SNS에서 ‘연대’라는 단어는 쉽게 쓰이고, 빠르게 소모된다. 해시태그 운동, ‘이슈 챌린지’, ‘온라인 서명’, ‘흑백 프로필 바꾸기’ 같은 행동은 순간적으로 수천, 수만 명이 참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참여는 대부분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상징적 행위에 그친다. 실제로 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은 소수이고, 대다수는 ‘연대 중’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디지털 관객일 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리시스트라테'에서 보여주었듯, 그 연대의 동기조차 자의적이고, 생존이 아닌 사회적 자기만족을 위한 경우가 많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가짜 연대가 실제 연대의 의미마저 퇴색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여 피로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해시태그는 사라지고, 이슈는 잊힌다. SNS는 기억보다 망각을 빠르게 유통하며, 한때 ‘의미 있는 운동’으로 여겨졌던 해시태그는 결국 브랜드화된 자기 연출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리시스트라테' 속 인물들이 명분은 크지만 행동은 부실했던 것처럼, 오늘날 SNS의 연대는 실천이 결여된 선언, 피상적 감정 공유, 노출 중심의 이벤트에 가깝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미 2,400년 전 그 말뿐인 평화의 허무함을 간파했다. 그리고 지금 SNS는 그 예언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4. 허무한 광장: 아테네의 희극과 SNS의 극장화된 일상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단지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무대는 시민 모두가 참여하고 관람하는 민주주의의 거울이자 비판의 실험실이었다. '개구리'에서는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킬로스, 두 비극 시인의 귀환을 두고 예술과 진정성의 우위를 경쟁시키며, 결국 문화와 정치, 대중과 엘리트의 위계가 섞여 혼란스러워지는 현실을 희화화한다. '아카르나이 사람들'에서는 전쟁을 조롱하는 주인공 디카이오폴리스가 혼자만의 평화를 계약하며, 모두가 전쟁을 외칠 때 홀로 장을 열고 평화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는 공적 의제의 사유화, 이기적 평화의 전시를 풍자한 장면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언제나 진지한 메시지를 유쾌하게 던지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오늘날의 SNS는 외형상 민주적 소통 공간이지만, 실상은 모두가 주연을 자처하는 무대, 즉 ‘디지털 극장’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말하고, 찍고, 올리고, 퍼뜨리며 마치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그 말은 대부분 자신을 위한 말이며, 그 행동은 타인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다. SNS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나 진정성이 아니라, 얼마나 멋진 장면으로 보이는가, 얼마나 잘 소비되는가이다.

 

이러한 ‘극장화된 일상’은 시민을 관객으로 만들고, 관객은 점차 비평과 참여가 아닌 구경과 채널 전환에 익숙해진다. 정치도, 시사도, 연대도, 자기 계발도 결국은 ‘구독 가능한 콘텐츠’로 환원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걱정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웃음이 웃음으로 끝날 때, 광장은 점점 말라간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SNS라는 거대한 디지털 광장에서 ‘정말 말해야 할 것’은 사라지고, ‘잘 팔리는 말’만 남는 현실을 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있었다면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웃기는 것조차, 너무 계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