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중 없는 정치는 없다: 로마의 광장과 오늘의 플랫폼
고대 로마 공화정은 ‘시민 참여’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작동했다.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 제도 등은 권력의 분산과 견제를 전제로 하며, 법과 제도를 통한 통치라는 이상을 지향했다. 그러나 '로마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상은 점차 대중 선동과 이미지 정치로 전락해 간 과정을 명확히 보여준다. 로마 초기의 정치인은 법률가이자 군인이었고, 토론과 설득을 중시하는 공론의 시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클로디우스 같은 인물은 도시 빈민을 조직화해 일종의 ‘사병화된 군중’을 만들었고, 포룸(광장)은 공적 논의의 장소에서 선동과 조작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그는 연설, 유머, 폭로, 그리고 연출된 분노로 군중의 열광을 이끌어냈으며, 실제 정치적 결정보다 '인기와 영향력'이 권력의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인플루언서 정치의 토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현대의 디지털 플랫폼은 과거 로마의 광장처럼 공론장이면서도 동시에 감정 소비의 무대가 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X(구 트위터)와 같은 공간은 정당 소속 없이도 누구나 ‘팔로워’를 기반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이 되었고, 이는 곧 ‘정치적 자산’으로 환산된다. 과거의 클로디우스가 실제 법적 권한보다 군중의 열광으로 힘을 얻었다면, 오늘날의 인플루언서는 제도 밖에서도 여론을 주도하고, 정책에 영향을 주며, 심지어 정치 입문 자체를 결정짓는 변수가 된다. 현실 정치인들 역시 이 흐름에 적응하고 있다. 공청회보다 라이브 방송, 정책 문서보다 밈(meme), 연설보다 SNS 게시물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지는 시대, 우리는 점점 더 ‘콘텐츠 기반 정치’에 익숙해지고 있다. 로마에서 포럼이 권력의 심장으로 변모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플랫폼 알고리즘이 정치적 결정력을 좌우하는 새로운 심장으로 뛰고 있다.
2. 포퓰리즘의 진화: 빵과 서커스, 그리고 바이럴 콘텐츠
로마 공화정의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인은 더 이상 단순한 제도 설계자나 법률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군중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가장 중요한 정치 전략으로 삼았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이후,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수단은 점점 감성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에 집중되었다. 카이사르는 곡물 배급을 확대하고, 대규모 경기를 열며, 가난한 시민들에게 무료 공연과 음식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빵과 서커스’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일시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민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결국 로마의 공화정은 ‘참여하는 시민’이 아닌 ‘즐기는 군중’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이 구조는 오늘날의 인플루언서 정치와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인플루언서는 정보 전달자이면서 동시에 감정 자극 자다. 바이럴 콘텐츠, 밈 이미지, 짧고 자극적인 영상은 소비자의 참여를 유도하기보다, 반응을 유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SNS 정치 콘텐츠는 대부분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 이분법적 구도, 감성 과잉을 활용한다. 정책이나 법제 같은 구조적 이야기는 외면받고, 선악 프레임이나 개인사 중심의 콘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독점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서커스’다.
이러한 흐름은 시민의 정치적 성숙도를 저하할 위험이 있다. 로마의 군중이 빵과 경기장에 길들여지며 공화정의 기능을 잃었듯, 오늘날의 유권자도 끊임없이 제공되는 콘텐츠와 짧은 만족에 익숙해지며 깊은 숙고와 토론에서 멀어지고 있다. 정치는 참여가 아닌 소비가 되고, 정당은 플랫폼이 되고, 공론은 알고리즘에 의해 왜곡된다. 포퓰리즘은 단지 ‘민중의 인기 영합’이 아니라, 정치를 감각 자극의 연속된 쇼로 치환시키는 구조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예고한다.
3. 영향력은 권력이 된다: 카이사르의 이름, 인플루언서의 브랜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 역사상 가장 탁월한 ‘자기 연출의 달인’이었다. 그의 승리와 행적은 단순히 전투 기록이 아니라, 정치적 콘텐츠로서 구성되었다. 예를 들어 '갈리아 전쟁기'는 사실상 자서전 형식으로 쓰인 '자기 홍보 문서'였으며, 전투 승리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그 승리를 기억되게 하느냐였다. 그는 병사들에게 직접 식사를 나누어주고, 대중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감정을 공유했고, 로마에 돌아와선 개선 행렬을 열고 기념 동전을 발행해 자신의 이미지를 시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이처럼 카이사르는 콘텐츠, 퍼포먼스, 감정 연결을 모두 활용한 브랜드 정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인플루언서 정치의 중심에도 바로 이런 ‘브랜드 구축’이 있다. 현대의 정치인은 정당 소속 이전에 '누구인가'를 먼저 정의 받는다. SNS상의 이미지, 개인 스토리, 언론 인터뷰, 영상 콘텐츠 등을 통해 하나의 ‘디지털 캐릭터’로 포장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이 브랜딩이 정치적 설득보다 더 큰 무기가 된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인의 정책 내용보다 그의 ‘말투’, ‘패션’, ‘가족관계’, 혹은 ‘밈화된 영상’이 유권자들에게 더 큰 인상을 남긴다. 콘텐츠는 더 이상 보조 수단이 아니라, 정치 행위 그 자체로 기능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공적 책임보다는 사적 정체성이 과잉될 위험이 커진다는 점이다. 카이사르의 브랜딩이 공화정의 권력 균형을 무너뜨렸듯, 현대 정치에서도 과도한 개인 중심의 메시지 구조는 정당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정치인은 공동체를 대표해야 하지만, 브랜딩에만 몰두하면 팔로워 수와 댓글 반응에 민감한 연예인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로마사'가 말하는 교훈은 분명하다. 영향력은 쉽게 권력으로 바뀔 수 있고, 그 권력이 제도 위에 놓일 때, 정치의 구조는 흔들린다는 것이다.
4. 공화정의 유산은 가능한가: 디지털 시대의 정치 회복
'로마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카이사르의 암살이 아니다. 브루투스조차 대중의 열광을 되돌릴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로마는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민중은 이미 ‘제도’보다 ‘인물’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화정은 무너졌고, 로마는 황제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것이 바로 브랜딩 된 권력의 최종 단계였다(정치는 구조가 아니라, 캐릭터가 되는 순간 새로운 균형은 불가능해진다.)
오늘날 우리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디지털 플랫폼은 정치 참여를 혁신했지만, 동시에 공론장의 감정화, 정치인의 사유화, 권력 감시의 약화라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정치인은 인플루언서가 되고, 인플루언서는 정치인의 언어를 흉내 낸다. 시민은 정보 수용자가 아니라 클릭 유도 대상이 되고, 공론은 알고리즘의 파도 속에 잠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묻고 판단해야 한다(정치는 누구의 이야기이며, 무엇을 위한 무대인가?)
하지만 이 비극적인 흐름을 단지 경고로 끝낼 필요는 없다. 로마의 공화정이 무너졌던 이유는 대중이 카이사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공화정을 지키는 시스템이 대중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시민으로서 여전히 선택권을 갖고 있다. 플랫폼이 아닌 제도에 대한 믿음을, 캐릭터가 아닌 정책에 대한 요구를, 콘텐츠가 아닌 구조적 숙의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브루투스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기술'이다. 브랜딩은 그 관계를 시작하게 해줄 수는 있어도, 유지해 주지는 못한다. 지속 가능한 정치란 신뢰와 구조 위에 세워진 공화정적 정신에서 비롯된다. 인플루언서 정치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로마의 실패를 반복할 것인지, 혹은 그 교훈을 통해 성숙한 정치 문화를 새롭게 정립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서 있다.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픽테토스'의 담대함과 현대 불안 치료 (0) | 2025.05.02 |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퍼스널 미션 만들기 (1) | 2025.05.02 |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으로 본 SNS 풍자 (0) | 2025.05.02 |
'한비자'와 자기계발: 냉정하게 성공하기 (0) | 2025.05.01 |
'수호지'로 보는 커뮤니티 붕괴와 재건 (0) | 2025.04.30 |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플랫폼 독점 시대 (0) | 2025.04.30 |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메타버스 철학 (0) | 2025.04.29 |
'논어'로 본 MBTI 시대의 인간 관계 전략 (0) | 202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