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홉스의 '자연상태'와 무질서한 디지털 세계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 본성을 철저히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해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상태를 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불렀다. 법과 규율이 없는 상태에서는 정의나 불의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오직 힘만이 정의를 대신하게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이 같은 자연 상태는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존재하는 지옥과도 같은 상태이며, 홉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계약과 절대권력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홉스의 자연 상태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 세계의 초창기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던 초기, 디지털 공간은 마치 규칙 없는 광야와 같았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정보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려웠고, 불법적인 거래나 해킹, 악성코드 등이 난무했다. 수많은 개인, 기업, 단체가 서로 얽히며 무한 경쟁을 벌였고, 명확한 규율이나 중앙 통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짜 뉴스가 퍼지고, 개인정보 유출과 해킹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사용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방치된 상태였다. 이 혼란은 단순한 초기 기술 부족이 아니라, 홉스가 묘사한 자연 상태처럼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경계하고 공격하는, 무규율적 디지털 생존 경쟁의 모습이었다. 결국 인터넷 사용자들은 이 무질서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즉 강력한 '디지털 리바이어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초거대 플랫폼 기업들이었다.
2. 리바이어던의 등장: 플랫폼의 절대권력화
홉스는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어 절대권력을 가진 주권자를 세운다고 보았다. 이 주권자는 모든 개인의 권리를 흡수하고, 절대적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비슷한 일이 디지털 세계에서도 벌어졌다. 사용자는 무질서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보를 보호받고, 신뢰할 수 있는 콘텐츠를 얻고, 원활한 소통과 거래를 원했다. 이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등장한 것이 구글, 아마존, 메타(구 페이스북), 애플 같은 초거대 플랫폼이었다. 이들은 검색, 쇼핑, 소셜네트워킹, 앱 생태계를 통합하며 디지털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다.
처음에는 이 플랫폼들이 가져온 편리함과 질서가 찬사를 받았다. 구글은 혼란스러운 인터넷 정보를 정리해 주었고, 아마존은 신뢰할 수 있는 거래를 보장했으며, 메타는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시켜주었다. 사용자는 점점 더 많은 권리와 데이터를 이들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검색 기록, 구매 습관, 사회적 관계망, 심지어 위치 정보까지 플랫폼의 손에 들어갔다. 이는 마치 홉스가 설명한 사회계약과 같다. 각 개인은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는 절대 권력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리바이어던은 홉스가 상상했던 공공선을 위한 주권자와는 달리, 기업 이윤이라는 목적에 봉사한다. 플랫폼은 사용자 데이터를 독점하고, 알고리즘을 비공개로 운영하며, 시장을 왜곡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사용자들은 점차 플랫폼이 설정한 규칙과 알고리즘의 논리에 의해 행동을 제한받는다. 선택지는 다양해 보이지만, 실질적인 선택권은 플랫폼이 허용한 범위 안에 갇혀 있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리바이어던은 단순한 질서 유지자가 아니라, 사용자의 삶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진화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자유를 포기하고 얻은 질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질문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3. 플랫폼 독점의 그림자: 리바이어던의 부패 가능성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절대 권력을 강조했지만, 그 권력이 부패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깊게 다루지 않았다. 그의 전제는, 절대 권력이 있어야만 무정부적 자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플랫폼 시대의 현실은,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그것이 공공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악용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구글, 메타, 아마존 같은 초거대 플랫폼들은 단순히 시장을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사고방식, 소비 패턴, 정치적 의견 형성 과정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이들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고, 자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용자의 인식을 유도하는 알고리즘을 운용한다.
예를 들어, 검색 결과를 특정 광고주나 이해관계자에게 유리하게 조정하거나,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하여 맞춤형 광고를 통해 소비를 조장하는 사례는 매우 흔하다. 더 나아가, 정치적 뉴스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보 편향이 강화되면서, 사회 전체가 확증편향과 극단화로 치닫는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연결된다. 사용자는 다양한 정보를 자유롭게 접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지만, 플랫폼은 알고리즘을 통해 사용자가 보고 듣는 세계를 은밀히 제한한다. 홉스가 상상한 리바이어던은 최소한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 했지만, 현대의 디지털 리바이어던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며,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더 심각한 것은, 사용자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플랫폼이 제공하는 제한된 옵션 안에서만 행동하고 사고하게 된다. 이는 홉스가 경고했던 자연 상태로의 퇴행과 다를 바 없다. 무질서한 자연 상태 대신, 관리되고 조작된 '가상의 자연 상태'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결국 플랫폼 독점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절대군주제'를 만들어냈고, 이 절대군주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가고 있다.
4. 새로운 사회계약을 꿈꾸다: 플랫폼 권력에 맞서는 시민의 길
홉스가 강조했던 사회계약은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였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 시대의 시민은 더 이상 단순히 보호받는 존재에 머물 수 없다. 디지털 세계에서 개인은 능동적인 주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계약을 요구해야 한다. 단순히 절대권력에 종속되어 안정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민주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사회계약을 재구성해야 한다. 데이터 주권, 알고리즘의 투명성, 플랫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제 디지털 시민권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GDPR(일반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통해 데이터 소유권을 사용자에게 돌려주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으며, 미국과 다른 나라들도 초거대 플랫폼 규제 법안을 적극 논의하고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자신의 데이터, 프라이버시, 정보 선택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은 공공 인프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단순한 사기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져야 하는 존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자연 상태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하지만,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는 그 위임이 무조건적이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는 견제와 투명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디지털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알고 행사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 전체는 플랫폼 리바이어던을 감시하고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플랫폼 독점 시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홉스적 사회계약을 넘어선, 시민 주권에 기반한 새로운 디지털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데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유를 지키고, 진정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리바이어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리바이어던을 견제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다.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으로 본 SNS 풍자 (0) | 2025.05.02 |
---|---|
'한비자'와 자기계발: 냉정하게 성공하기 (0) | 2025.05.01 |
'로마사'를 통해 읽는 인플루언서 정치 (1) | 2025.05.01 |
'수호지'로 보는 커뮤니티 붕괴와 재건 (0) | 2025.04.30 |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메타버스 철학 (0) | 2025.04.29 |
'논어'로 본 MBTI 시대의 인간 관계 전략 (0) | 2025.04.29 |
'로빈슨 크루소'는 요즘 자급자족 유튜버인가 (0) | 2025.04.28 |
중세 수도사의 시간표로 1일 1시간 루틴 만들기 (0) | 2025.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