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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리스킬링 트렌드

by lee-niceguy 2025. 5. 4.

1. 존재의 유연함: 다프네와 현대인의 정체성 변화

 

'변신 이야기'의 첫 번째 상징적 인물 중 하나는 다프네다.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 그녀는 끝내 월계수로 변신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지키는 방식으로 탈피를 선택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신화적 환상처럼 보일 수 있지만, 현대인의 삶에선 정체성의 전환과 경계선상의 주체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메타포다.


디지털 기술, 산업 구조, 시장의 기대가 시시각각 변하는 오늘날의 노동환경에서, 개인은 ‘지속 가능한 자아’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리스킬링은 더 이상 특정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자기 존재를 재구성하는 전환의 능력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때 전문직이라 불렸던 직업도 디지털 자동화와 플랫폼화에 따라 더 이상 안정적인 경로가 아니며, ‘한 우물 파기’보다는 다양한 서사를 품을 수 있는 가변적 자아가 경쟁력 있는 시대다. 다프네는 스스로 월계수가 됨으로써 고정된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직무적, 정체성적 재편의 비유로 읽을 수 있다.

 

과거의 경력, 학력, 직무가 더 이상 나를 설명해 주지 못할 때, 우리는 누구로 살아야 하는가? 오비디우스는 말한다. "변신은 도피가 아니라 저항이다."


오늘날 리스킬링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퇴보가 아니라, 능동적인 정체성 재서술의 서사 구조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단한 정체성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내면의 회전력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리스킬링 트렌드

 

2. 실패 이후의 전환: 아라크네와 리스킬링의 회복성

 

'변신 이야기'에서 아라크네는 인간의 손재주로 여신 아테나에게 도전했다가 결국 거미로 변한다. 이 신화는 오만의 대가이자 패배의 비극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 변신의 결과는 새로운 생태적 존재로의 이행이었다. 거미가 된 아라크네는 이전보다 더 정교하게 그물을 짜며, 스스로 기술을 재발명하는 존재로 재정립된다. 이 이야기는 실패 이후의 회복 가능성, 변신을 통한 기술의 재맥락화라는 점에서 오늘날 리스킬링의 철학과도 맞닿는다.

 

현대의 리스킬링은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것을 넘어, 실패 이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스타트업 붕괴, 경력 단절, 산업 구조조정 등으로 좌절을 겪은 수많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언어, 새로운 플랫폼 위에서 스스로를 다시 조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과 기능을 실험할 수 있는 마음의 회복력(Resilience)이다. 아라크네는 패배했지만, 그녀의 변신은 창조의 도구를 바꾼 진화의 메타포였다.

 

리스킬링은 ‘실패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실패의 서사를 새로운 기술적 지층에 이식하여 다른 형태로 꽃피우는 작업이다. 직무 전환이 아니라 삶의 서사 전환이며, 과거의 좌절을 미래의 역량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창조적 전략이다. 오비디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변신은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주는 또 다른 문법이다.”


오늘날 실패 이후의 리스킬링은, 잃은 것을 다시 얻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다시 살아내는 기술이다.

 

3. 자기 설계의 서사: 피그말리온과 능동적 재창조

 

피그말리온 신화는 전통적으로 이상화된 이미지를 현실로 끌어오는 사랑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이 서사의 핵심은 단순한 사랑의 기적이 아니다. 피그말리온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그려낸 이상적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창조자였다. 조각가는 돌덩이를 이상으로 바꾸는 기술을 갖췄고, 그 기술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과 정서적 몰입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리스킬링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와 닿는다. 리스킬링은 단순히 새로운 툴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내 손으로 구체화하는 능동적 창조 행위다.

 

현대 사회에서 리스킬링은 더 이상 이직 준비나 스펙 보완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노동의 목적을 다시 정의하고, 사회적 역할에 주체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교육이나 커리어 전환의 장면에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능하고 싶으냐’는 질문이 중요하다. 피그말리온은 단지 조각상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삶의 형태를 외부화시킨 존재와 마주했기 때문에 변화를 경험했다. 이는 우리가 기술을 배울 때, 단지 수단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어떤 방식의 자기를 실현할 것인가를 묻는 자세와 맞닿는다.

 

실제로 오늘날 리스킬링은 예술과도 닮았다. UX 디자인을 배우는 직장인, AI 모델링을 공부하는 중년, 스마트팜 기술을 도입하는 귀농인, 그들은 단지 기술을 수용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생애 설계의 주체다. 리스킬링이 실패하는 경우는 대체로 '기술'만 보고 '삶의 목적'을 보지 못할 때다.


피그말리온은 조각이 살아난 후에도 그것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상상했기에, 신의 축복을 받는다. 기술은 수단이고, 자기 설계가 목적이다. 리스킬링이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기술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과 내면적 기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오비디우스는 피그말리온을 통해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의 리스킬링도 마찬가지다. 내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고, 그 변화 과정을 감정과 의지, 상상력으로 직조할 수 있을 때, 리스킬링은 단순한 학습을 넘어 자기 인생의 조형 예술이 된다.

 

4. 유동성의 시대: 나르키소스와 정체성의 위험한 고정

 

'변신 이야기' 속 나르키소스는 스스로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연못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다 그 모습에 빠져 죽는다. 그는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단절한 채, 자기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힌 상태로 굳어져 버린 인물이다. 오비디우스가 이 신화를 통해 경고하는 것은 자기 동일성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 가져오는 실존적 폐쇄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이야기는 정체성의 고착이 리스킬링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 역할, 직무, 타이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디자이너다”, “나는 교육자다”, “나는 관리직이다”라는 식의 경력 기반 자기 정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만든다. 이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변화된 역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축소하거나 고립시키게 된다. 나르키소스처럼, 우리는 과거의 '잘 나갔던' 모습, 인정받던 시절의 자아에 스스로를 가두고, 거기서 벗어날 기회를 잃는다. 이는 단지 자기애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된 정체성에 의해 현재의 가능성이 봉쇄되는 현상이다.

 

오비디우스는 나르키소스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는 변화를 못한 자가 결국 변화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물속에서 죽은 나르키소스는 결국 수선화로 변한다.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한 생존, 즉 ‘변신’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정체성은 유일하지 않으며, 우리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층적 자아로 존재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의 리스킬링은 이처럼 고정된 자아에서 유동적 자아로의 철학적 전환을 요구한다.

 

정체성의 유연성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 능력이다. 고정된 자아가 과거의 성공을 담보했다면, 유동적인 자아는 미래의 가능성을 설계한다. 리스킬링은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자산을 새로운 정체성의 물결에 맞게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오늘 우리가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 실시간 정체성이다.

 

오비디우스는 “그는 물속의 그림자를 사랑했으나, 그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는 거울이 아니라 창을 보아야 한다. 나를 닮은 과거가 아닌, 나를 넘어설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리스킬링은 변신이 아니라 진화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