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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마라탕 중독자의 고백

by lee-niceguy 2025. 5. 27.

1. 맹세와 맛의 경계: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마라탕 한 그릇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필요하다는 믿음 아래 ‘선서’를 남겼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을 담은 이 선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의료인의 윤리적 나침반이 되고 있다.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해를 끼치지 않겠다.” 이 말은 단지 병원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몸’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된다.
 
하지만 이 맹세는 마라탕 앞에서 무너진다. 누가 뭐래도 마라탕은 매력적이다. 각종 향신료가 어우러진 얼얼한 국물, 원하는 재료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의 유희,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구조. 그러나 이 즐거움 뒤에는 위장을 조이는 고지방·고염분·고칼로리의 조합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몸은 이미 여러 번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마라탕의 향기와 혀끝의 자극은 그 신호를 가볍게 무시하게 만든다.
 
‘먹는 것이 곧 나’라고 말하는 시대, 음식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닌 정체성의 일부다. 그런 점에서 마라탕은 현대인의 스트레스, 자기 위안, 통제력 상실을 잘 반영하는 음식 중 하나다. 의사는 타인을 위해 맹세하지만, 정작 우리는 나 자신에게 어떤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문장은 의료 현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자신을 돌보고, 해롭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윤리적 메시지로 다시 읽혀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마라탕 중독자의 고백

 

2. 내가 나의 환자입니다: 식습관과 자기 진료의 실패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의료계에서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맹세’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겸허한 이해에서 비롯된 윤리적 경계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중 “나는 내 환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나의 한계를 인지하며,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조항은, 의사가 타인에게 함부로 개입하거나 오만하게 처방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시킨다. 그런데 이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진정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내 신체의 신호를 경청하고 있는가?
 
마라탕 중독자의 하루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자가 진단’과 ‘자가 처방’으로 구성된다. 아침에 속이 쓰리면 “전날 야근 탓이지, 스트레스 때문에 위산이 나왔나 봐”라고 생각하고, 점심엔 당연하다는 듯 “위 좀 달래줘야겠다”며 따뜻한 마라탕을 주문한다. 이 행동은 얼핏 보면 자가 치료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합리화와 중독의 회로를 강화하는 행동이다. “어제보다 매운맛 단계를 낮췄으니 덜 해롭겠지”, “당면 대신 곤약 넣었으니 균형 잡혔어”라는 판단은 진료의 언어가 아니라, 쾌락의 변명에 가깝다. 그 순간의 판단은 건강을 위한 결정이 아니라 입맛과 감정의 즉흥성에 굴복한 변명이 된다.
 
더 나아가 마라탕이라는 음식의 조립식 구조 자체가 이러한 합리화를 촉진한다. 본인은 국물 농도, 재료, 매운맛 단계를 선택하며 마치 맞춤형 건강 식단을 구성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 선택은 ‘입맛을 기준으로 한 개인화’이지, 건강을 기준으로 한 ‘맞춤 의료’가 아니다. 마라탕이라는 프랜차이즈 시스템은 오히려 ‘나를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소비 경험’을 제공하며, 진짜 건강 상태와의 단절을 정교하게 위장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각적 회피 전략(sensory avoidance strategy)’이라고도 한다. 불편한 신체 신호나 건강 경고를 외면하고, 그 순간의 기분과 쾌감에 몰입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그중 마라탕은 그 감정의 틈을 파고드는 대표적 위로제 역할을 한다. “너 오늘 많이 힘들었잖아, 이 정도는 먹어도 돼”라는 자기 위로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내 안의 ‘나쁜 의사’가 되어 정확하지 않은 진단과 처방을 남발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의사가 단 한 번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3. 중독의 윤리: 의도된 무지와 쾌락의 정당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고대 의학자가 후세에 남긴 지혜가 담겨 있다. “나는 고통을 완화하되, 쾌락을 남용하지 않겠다.” 이 말은 의사가 환자에게 진통제를 과도하게 처방하지 않겠다는 의학적 윤리를 넘어, 삶의 리듬을 파괴하지 않기 위한 도덕적 태도로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마라탕 중독자들은 그 리듬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매운맛이라는 감각적 자극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은, 혀가 마비되거나 속이 쓰린 것을 '감각의 일부', 심지어 '맛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단지 매운 국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쾌락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는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의도된 무지(willful ignorance)’가 깔려 있다. 건강에 해롭다는 건 알고 있다. 전문가들도 말한다. SNS 알고리즘은 건강 경고 콘텐츠를 추천해 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정보를 무시한다. “이 정도로 아프진 않잖아”, “지금 당장 행복한 게 더 중요하지”라는 생각으로 모든 경고를 상쇄한다. 이는 단지 무지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외면하는 자기기만의 정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교묘하게 거짓말할 수 있는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중독자는 자신을 정당화할 논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다. “스트레스 해소에는 매운 게 최고”라는 말은 과학적 근거 없이 반복되며 마치 불문율처럼 받아들여진다. “마라 향신료는 면역력을 높여준다”, “중국 전통 약초가 들어가니까 오히려 건강에 좋아”라는 주장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도 자신을 안심시키는 만병통치 해석이 된다. 이는 의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근거 없는 민간요법’과 다르지 않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경고는 이런 순간을 위한 것이다. “나는 환자의 무지를 악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무지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국물 한 그릇을 핑계로, 우리는 삶의 균형과 건강을 조금씩 흘려보내고 있다. 중독은 결국 몸과 마음이 조화를 잃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마라탕은 입맛만이 아니라, 나의 자율성, 판단력, 책임감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맹세 없는 식사: 우리는 무엇을 몸에 남기고 있는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생명을 다룰 때 반드시 필요한 윤리를 설파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의료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몸을 관리하고,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즉, 매 끼니 앞에서도 ‘선서’ 같은 태도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마라탕 한 그릇 앞에서 그런 맹세는 보통 사라진다. 대신 “오늘 하루는 이걸로 위로받고 싶다”는 말이 맹세를 대체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장기적으로 위장의 점막을 희생시키고, 간헐적인 고통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맛이라는 신에게 의학적 판단을 양도하는 삶을 산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마라탕은 왜 이렇게도 끊기 어려운가? 그것은 단순한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의 고립감, 보상 욕구, 감정 해소 메커니즘이 응축된 상징적인 식사이기 때문이다. 바쁜 삶 속에서 한 그릇으로 정서적 허기를 달래주고, 지친 감각에 강한 자극을 던져주는 이 음식은 어쩌면 현대인의 ‘작은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존 방식이 반복되며 결국 몸과 마음의 지층에 남기는 것들이 해로움이라면, 우리는 그 앞에서 더 이상 눈을 감아선 안 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시작과 동시에 경계다. 생명을 대하는 태도, 몸을 존중하는 마음, 스스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사 선택 역시 그 윤리적 기준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마라탕은 분명 맛있지만, 그 맛이 우리 몸과 마음에 남기는 흔적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늘도 그릇 앞에서 다시 묻는다.
“이건 정말 괜찮은 선택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