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력과 일의 본질: 칼리굴라의 ‘무한한 야근’
알베르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는 흔히 오해되는 ‘폭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칼리굴라는 단순한 권력의 오용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끝까지 밀어붙인 실존적 탐구자다. 여동생 드루실라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무의미함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를 정치적 논리와 도덕적 질서를 모두 부정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는 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대사는 곧, 그가 ‘삶’과 ‘일’의 균형, 즉 우리가 말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철저히 무시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칼리굴라에게 황제라는 직무는 단지 국가 운영이 아닌, 자신의 실존적 분노와 불안을 표출하기 위한 무대가 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명령할 수 있는 입장에서 ‘무한한 야근’을 스스로 자초한다.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죽음을 무시한 삶’을 증명하기 위해 권력이라는 일에 몰입한다. 이는 마치 현대 직장인들이 번아웃이 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업무를 확장하며 자기를 소모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삶의 개인적 순간’이 없다. 황제의 정무도, 연회도, 처벌도 모두 하나의 무대이며, 그는 그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연기한다.
현대 사회에서 워라밸은 단순한 ‘칼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노동하는 기계’와 ‘살아 있는 인간’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찾느냐의 문제이며, 자기 존재의 질서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칼리굴라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라는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의무의 경계를 허물었고, 결국 자신조차 경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의 관리자나 리더들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일과 삶을 나누는 것이 약함의 표시’라는 착각이다. 칼리굴라의 몰입은 철학적으로 보면 매우 강해 보이지만, 실은 삶의 균형을 잃은 자가 무너지는 과정이다.
2. 허무주의와 과로: 삶이 지워진 자리
칼리굴라의 철학적 변화는 단순히 슬픔이나 애도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무너진 지점은, 세상에 본질적인 의미나 질서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각성을 경험했을 때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삶은 덧없으며, 인간의 모든 규칙은 임의적이라는 인식이 그를 뒤흔든다. 그는 세상을 고통스럽게 만든 ‘불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불합리함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연출하려 한다. 그러면서 일상, 윤리, 가치, 논리 모두를 비틀어 파괴한다. 그는 일(정무)의 표면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질서의 핵심을 조롱하며 인간 존재의 경계선을 지운다.
이 지점에서 칼리굴라는 일에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워커홀릭이나 번아웃 상태의 직장인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이와 유사하다. 그들은 종종 일에 몰입하는 것이 열정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공허함과 정체성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업무에 중독되고 있다. 이른바 ‘열정 페이’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이들이, 외면적으로는 자율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적 압박과 내부 결핍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칼리굴라는 황제로서 누구보다 많은 자율성과 권한을 가졌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조차 통제하지 못한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을 때, 인간은 쉽게 자신을 ‘역할’에 동화시키고, 그 역할 속에서 진짜 자신을 잃는다. 칼리굴라의 자기 파괴는 이 경계가 붕괴된 전형적 사례다. 현대에도 유사한 패턴은 계속된다. 상사의 기대, 자기 개발 강박, 일중독 문화 등은 점차 삶을 업무화시키고, 자아의 감정과 휴식, 느림의 권리를 박탈한다.
그리하여 워라밸의 붕괴는 결국 ‘일에 의한 자기 해체’라는 점에서, 칼리굴라의 최후와 맞닿아 있다.
3. 공감의 부재: 감정노동 없는 조직은 가능한가
칼리굴라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제거하고, 대신 명령과 통제만을 남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하거나, 냉소적으로 조롱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실현하려 한다. 이는 곧 조직에서 ‘감정’이라는 핵심적 윤리를 삭제했을 때 발생하는 위기 구조다. 그는 황궁이라는 조직의 수장을 자처하면서도, 그 조직 구성원들의 ‘감정적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의 정치는 통제이고, 그의 소통은 독백이며, 그의 관계는 서열이다. 이 구조는 결국 피로와 무력감, 반란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의 직장도 마찬가지다.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은 고객 응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상사와의 관계, 팀 프로젝트, 협업 회의, 퇴근 후 메신저 응답까지 현대 직장인은 하루 종일 감정 조율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감정노동이 ‘보상 없는 배려’로만 소비될 때, 직장은 조직이 아니라 감정 착취의 공간으로 전락한다. 칼리굴라의 궁정도 그런 곳이었다. 그의 허무주의적 통치는 구성원들에게 목적 없는 복종을 요구했고, 결국 그들은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렸다.
워라밸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감정적으로도 ‘휴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신체적 피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무기화되지 않은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리굴라는 권력자로서 감정조차 통제하려 들었고, 자신조차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조직에서도 감정이 통하지 않을 때, 업무는 효율만 남고 인간은 사라진다. 이처럼 공감이 없는 조직은 생존할 수 있어도, 성장하지 못한다.
4. 칼리굴라의 실패가 오늘날에 주는 메시지
'칼리굴라'의 결말은 단순한 황제의 몰락이 아니라, 일과 삶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소진되는가에 대한 철학적 은유다. 칼리굴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였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 ‘삶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다’를 회피하고 싶었던 자였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직면하는 대신, 죽음을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려 했으며,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그 시스템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우리는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알림, 사라진 경계, 감정노동의 무게는 오늘날 칼리굴라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
워라밸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일의 기능성’만이 아니라 ‘삶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윤리 시스템이다. 단지 육체를 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의 공간, 사유의 시간, 느림의 여백을 보장하자는 말이다. 칼리굴라는 그 여백을 끝내 거부했다. 그는 극단적 자기 몰입을 택했고, 결국 그 안에서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소멸했다.
오늘날 우리가 워라밸을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더 이상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삶을 희생하는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그 사실을 미리 보여준 경고장이자, ‘삶의 자율권을 지키기가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인가’를 상기시키는 철학적 서사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많은 일이 아니라, 더 인간적인 일, 더 인간적인 삶의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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