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4시간 오픈 채팅방의 공허함

by lee-niceguy 2025. 5. 25.

1. 영원회귀 없는 대화: 오픈 채팅방이 낳는 ‘가벼운 존재’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모든 것이 한 번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변주하여, 인간 존재의 무게와 가벼움 사이의 딜레마를 풀어간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않기에 선택의 결과를 되돌릴 수 없고, 반복되지 않기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다. 존재는 가볍고, 가벼움은 참을 수 없어진다. 이 철학적 고민은,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24시간 오픈 채팅방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재현된다.

 

오픈 채팅방에서는 관계가 자유롭다. 익명으로 참여하고, 즉시 나갈 수 있으며, 기록은 남지만 정체성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잠시 머물며 몇 마디 나누고 떠나며,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영원회귀가 없는 소통은 이처럼 그 자체로 가볍다. 하지만 그 반복되지 않는 대화들 속에서 사람은 점점 더 깊은 공허함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수십 번 접속하고 나가지만, 정작 ‘누구와 연결되었는가?’에 대한 실감은 거의 없다. 이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가득 차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텅 비어 있다.

 

철학자 바우만이 말한 ‘액체적 근대’의 인간관계처럼, 오픈 채팅방은 관계가 지속되기를 두려워하고, 동시에 단절은 두려운 사람들의 무대다. 그들은 연결되어 있되, 어느 순간에도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쿤데라가 말한 ‘존재의 가벼움’은 이제 말의 가벼움, 소통의 탈맥락화, 책임 없는 관계 구조 속에서 디지털 현실로 구현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말을 나누고 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모순 속에 빠지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24시간 오픈 채팅방의 공허함

 

2. 말의 폭주와 감정의 소진: 디지털 친밀감의 역설

 

오픈 채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언제든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익명의 사용자가 익명으로 들어와, 고민을 털어놓고 반응을 얻으며, 위로를 받고 다시 떠난다. 이러한 구조는 ‘연결의 자유’를 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오픈 채팅방에서 외로움을 덜고, 누군가의 공감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특히 관계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책임 없는 감정 소통이 가능한 이 공간이 구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구조가 지속 가능한 친밀감이 아닌, 감정의 일회적 소모를 반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감정의 즉시성 중독”이라 부른다. 감정은 본래 느끼고, 사유하고, 내면에서 소화되어야 하는 것인데, 오픈 채팅방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다. 대신 사용자는 빠른 반응, 이모티콘, 짧은 말로 위안을 주고받는다. 처음엔 ‘위로받았다’고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비어 있는 감정이 남는다. 왜일까? 그것은 진심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 건 아니었고, 나도 상대의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단지 순간적 위로의 기계적 구조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밀란 쿤데라는 감정이 반복되고 심화되어야 비로소 관계가 무게를 갖는다고 보았다. 테레사가 토마시에게 느꼈던 사랑은 단지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반복되는 갈등과 용서, 침묵과 이해를 통해 형성된 무게 있는 결합이었다. 반면 오픈 채팅방에서 오가는 대화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어제 위로를 주던 사용자는 오늘 방을 나가고, 새로 들어온 이는 또 다른 말투로 공감을 흉내 낸다. 이러한 비지 속성과 감정의 교체성은, 관계의 무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사용자는 더 많은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점점 정서적으로는 메말라간다.

 

이 구조의 문제는 단지 ‘지친다’는 차원이 아니다. 감정이 소진되면, 사람은 신뢰를 잃는다.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듣기보다는 “이번에도 곧 나가겠지”, “이 말도 그냥 형식이겠지”라며 냉소하게 되고, 결국 공감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이는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신뢰 기반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말은 많아지고, 연결은 쉬워졌지만, 진정한 연결감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디지털 친밀감의 역설. 쿤데라가 말한 ‘무게 없는 사랑’은 오늘날 말의 홍수 속에서 가장 가벼운 형태의 위로로 전락하고 있다.

 

3. 선택의 무게 없는 유희: 즉흥성 속에 사라지는 진정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쿤데라는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면, 우리의 선택은 절대 무겁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내린 결정은 아무런 절대적 기준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흥적이고 반복되지 않는 삶, 그 자체가 공허하다는 역설이다. 이 사유는 오픈 채팅방에서 이뤄지는 무수한 대화와 선택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오늘 한 말은 내일이면 사라지고, 어제의 이름은 오늘의 로그 속에서 지워진다. 사용자는 언제든 닉네임을 바꾸고, 방을 나갔다 다시 들어오며, 자신의 흔적을 흔적답지 않게 만든다.

 

이러한 자유는 언뜻 보면 해방이다.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에 매이지 않고, 원하는 만큼만 드러내면 되는 소통.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존재감과 자아 정체성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고, 말은 그 존재의 집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의 말은 뿌리가 없다. 매번 새로운 대화가 즉흥적으로 피어났다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진정성 있는 말과 일회성 말의 경계는 흐려진다. 우리는 점점 진심을 말하는 법을 잊고, 대신 ‘감정에 적당히 맞는 문장’을 조립하는 능력만을 키워간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오늘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했을 때, "힘내요!"라는 말은 위로가 될 수도, 공허한 자동응답일 수도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말이 어떤 맥락 속에서 반복되었고, 어떤 관계적 무게 속에서 주고받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오픈 채팅방은 그 맥락과 반복의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는 대화, 저장되지 않는 정서, 책임지지 않는 표현. 이러한 말들은 결국 ‘말하는 나’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쿤데라가 우려했던 “말의 즉흥성과 존재의 허약함”은 바로 이런 시스템 속에서 강화된다.

 

또한 문제는 이 모든 가벼움이 ‘무해한 유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말과 반응 속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데에 부담을 느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이’만을 선호하게 된다. 그 결과로, 누군가와의 관계가 무거워질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고, 대신 가벼운 말들의 순환 구조 안에 갇히게 된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가벼움은 처음엔 달콤하지만, 곧 그 무게 없음을 견디기 어려워진다.” 오늘날의 대화도 그렇다. 웃고 말하지만, 그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가벼움은 유희를 넘어, 존재의 방향을 흔드는 조용한 재앙이 될 수 있다.

 

4. 존재의 무게를 회복하려면: 디지털 시대의 고독과 책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국 가벼움을 택한 이들과 무게를 감당한 이들의 운명을 대비시키며, 인간 존재의 진정한 조건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토마시가 자유를 택한 끝에 공허를 느끼고, 테레사가 무게를 선택하며 안식을 얻는 장면은, ‘편안한 관계’보다 ‘깊은 책임’을 감내하는 삶이 더 진실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철학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디지털 공간에서 책임 없는 대화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언어와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오픈 채팅방 속에서 존재의 무게를 회복하는 일은 결국 ‘말을 줄이고, 고독을 견디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짜 존재감은 혼자일 때도 흐려지지 않는 자기 정체감에서 비롯된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무게는 괴롭지만, 그것이야말로 존재가 존재로서 유지되는 증거다. 고독은 괴롭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짜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내가 던진 말은 어떤 무게를 가졌는가? 내가 머무는 이 공간은 나를 살찌우는가, 아니면 점점 더 가볍게 만드는가? 고독을 견디는 힘 없이 관계를 갈망하는 일은, 결국 지속 불가능한 존재의 소비일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진짜 수양은, 채팅창 속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침묵, 연결 이전의 자기 자신을 견디는 연습에서 출발한다. 오픈 채팅방을 나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서조차 무거워지는 연습을 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