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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vs. 인스타그램 릴스: 어디로 간 내 시간

by lee-niceguy 2025. 5. 16.

1. 마르셀 프루스트의 기억 탐색 vs. 릴스 알고리즘의 무한 스크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감각하는지를 집요하게 탐색한 작품이다. 프루스트는 단순한 회상 수준을 넘어, 인간 내면에서 시간이 어떻게 발효되고 의미화되는지를 섬세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특히 유명한 마들렌 장면에서 그는 하나의 감각이 과거 전체를 불러일으키는 ‘무의식의 작용’을 보여준다. 마들렌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그는 유년 시절의 어느 봄날, 외할머니 집 앞에서 마신 홍차와 거기에 담긴 세계를 통째로 회상해 낸다. 이러한 기억은 시간 속에서 단절되지 않고 연결된 삶의 흐름이며,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단지 과거의 소실이 아닌, 삶의 감각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기억을 복원하기보다, ‘잊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인스타그램 릴스는 시간을 가장 빠르게, 가장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짧고 강한 자극을 연속으로 제공하는 이 플랫폼은 사용자의 감각을 쉴 틈 없이 자극하며, 시간 감각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릴스 좀 보다가 시간이 훅 갔네.” 바로 그 ‘훅 가는 시간’이 문제다. 프루스트는 시간을 되살리기 위해 수천 페이지를 써 내려갔고, 독자들은 그의 서사를 따라가며 자신의 기억을 함께 더듬는다. 반면 릴스는 ‘되새김 없는 시간’을 만든다. 기억은 남지 않고, 자극만이 남는다.
 
프루스트의 기억은 고통, 사랑, 질투, 불안처럼 인간 경험의 본질에 연결되어 있다. 그가 복원한 시간은 단지 ‘과거의 사진’이 아니라, 현재의 자아를 형성하는 구성요소다. 반면 릴스를 넘기는 손가락 아래에서 흐르는 시간은 나의 삶과 아무 연관이 없다. 내가 본 영상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나의 취향을 분석한 알고리즘이 제안한 것이지만, 그 안에 ‘나의 역사’는 없다. 프루스트의 문학은 기억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고, 릴스는 망각을 통해 소비자를 재구성한다. 기억의 통로가 감각이었다면, 지금은 기기가 우리의 감각을 대리하고, 삶을 기록하는 대신 삭제한다.
 
우리는 여전히 시간을 잃고 있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탐색했던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릴스에서 잃은 시간은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니었던 시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소유하지도 않았고, 감각하지도 않았으며, 복원할 단서도 없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존재를 ‘기억의 회복’으로 증명했지만, 우리는 존재를 ‘자극의 흔적’ 속에 방치한 채 잊어간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디지털 시대의 진짜 비극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vs. 인스타그램 릴스: 어디로 간 내 시간

 

2. 기억의 문학과 피드의 문화: 서사에서 스낵으로

 
프루스트의 글은 마치 시간 자체를 걷는 산책 같다. 한 문장을 읽는 데 몇 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시간의 층위와 감정의 울림, 공간의 촉감까지 밀도 높게 녹아 있다. 그는 한 번의 감정, 한 번의 장소를 수없이 되짚으며, 독자가 그 순간을 ‘함께 살아내게’ 만든다. 이는 곧 ‘서사’의 본질이다. 서사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구조이며, 과거의 사건을 정렬하여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구상하게 한다. 프루스트의 문학은 독자에게 “너는 누구였는가?”, “지금의 너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반면 릴스의 피드 문화는 질문하지 않는다. 오직 ‘다음’을 보여줄 뿐이다. 스와이프 한 번이면 새로운 콘텐츠가 튀어나오고, 영상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영상이 기다린다. 콘텐츠는 점점 짧아지고, 자극은 강해진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지만,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른바 ‘스낵 콘텐츠’는 가볍게 소비되지만, 감정의 포만감도, 의미의 축적도 없다. 과거에는 책 한 권, 영화 한 편, 사진 한 장이 기억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수십 개의 영상이 ‘기억 불가능한 자극’으로 사라진다. 한 사람의 하루가 15초 영상 수십 개로 구성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그렇게 구성된 하루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구조가 단지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사고방식, 감정 처리 구조,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받는다. 긴 글을 읽는 인내가 사라지고, 단순하고 확실한 메시지만이 살아남는다. ‘읽히는 것’이 아니라 ‘넘겨지는 것’이 중요해졌고, 스토리텔링은 점점 ‘클릭 유도용 후킹’으로 전락하고 있다. 프루스트가 말한 진짜 이야기는 ‘삶을 곱씹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릴스는 ‘곱씹을 수 없는 삶’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삶을 살기보다, 삶의 파편을 소비하고 있다.
 
결국 기억의 문학은 인간의 존재를 정리하고 확장하는 통로지만, 피드의 문화는 인간의 존재를 흐리게 만들고, 사유할 틈을 없앤다. 우리가 하루에 마주치는 수많은 영상은 사실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흉내를 낸 감정의 파편이며, 의미 없는 자극의 반복일 뿐이다. 프루스트는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삶 전체를 회상했지만, 우리는 오늘 하루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영상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 이것이 서사에서 스낵으로 넘어간 시대의 진정한 풍경이다.
 

3. 의미 없는 반복의 쾌락: 프루스트식 반복 vs. 알고리즘식 반복

 
프루스트는 반복을 통해 깊이를 만든다. 그는 반복적으로 장소를 방문하고, 같은 인물과의 관계를 되새김하며 삶의 결을 추적한다. 이 반복은 내면의 확장과 연결되며, 같은 사건이 다른 시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반복은 단조롭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심층을 파헤치는 장치다. 반면, 릴스의 반복은 자극 그 자체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상’을 계속해서 던져준다. 같은 유형, 같은 리듬, 같은 주제를 가진 영상들이 ‘다른 콘텐츠인 척’ 몰려온다. 이 반복은 감정의 자극은 주지만, 사고의 확장은 전혀 없다. 그것은 단순한 쾌락의 루프다. 프루스트는 반복 속에서 시간의 의미를 재구성하지만, 릴스는 반복을 통해 시간을 증발시킨다. ‘다름을 가장한 같음’이 끊임없이 우리를 붙잡고, 우리는 마치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정작 나중에 돌아보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봤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기억의 실종이 아니라, 기억할 가치조차 부여되지 않은 소비의 결과다. 반복은 본래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도구였지만, 알고리즘 속의 반복은 인간의 의식을 ‘최소화’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런 반복은 결국 ‘생산적 피로감’이 아니라, ‘무력한 쾌락 중독’만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미디어 습관의 문제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망각하게 만드는 구조적 위험이다.
 

4. 디지털 시대의 시간 감각 상실: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간이 시간을 ‘기억과 감각’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는 수치가 아니라, 살아낸 감정의 총체다. 프루스트가 한 조각의 과자에서 인생 전체를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시간 감각이 내면의 리듬을 기준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인은 디지털 기기의 리듬에 맞춰 시간을 구성한다. 아침 알람, 회의 일정, 콘텐츠 업로드 시간, 유튜브 프리미어 알림 등 ‘타인의 시간표’에 끌려다닌다. 특히 릴스는 사용자의 시간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몇 분만 보자고 했던 영상 시청이 1시간을 삼켜버리는 현상은 익숙하다. 시간은 경험되지 않고, ‘측정될 뿐’이다. 우리는 이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거나 흘려보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프루스트가 시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 했던 반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자아를 점점 더 잃고 있다. 릴스를 보고 있던 나는 누구인가? 왜 그 영상을 보았으며, 그것이 나에게 어떤 정서를 남겼는가? 아무것도 답할 수 없다면, 그 시간은 정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측정할 수는 있어도, 느낄 수 없게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은 어딘가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 닿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우리가 다시 시간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콘텐츠가 아니라, ‘멈춤’과 ‘의식적인 체험’이다. 마르셀이 마들렌을 음미하듯, 우리도 하루의 5분이라도 온전히 느끼고 기억하는 연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