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의 이야기, 룸메이트들의 하루: '캔터베리 이야기'와 자취방 서사의 시작
'캔터베리 이야기'는 제프리 초서가 중세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한데 모아 만든 이야기의 집합체다. 그 구조는 단순한 옴니버스가 아니다. 각기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목적지(캔터베리 대성당)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길 위에서, 차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성이 핵심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당대 사회의 위선, 모순, 인간 군상의 허점과 애환이 묻어난다. 사제, 기사, 상인, 의사, 대장장이, 수녀 등 각자의 사회적 위치와 개인적 가치관은 그들의 이야기 방식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독자에게는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수많은 인생의 조각을 던져준다.
이러한 구조를 오늘날로 가져온다면, 그 가장 유사한 공간은 단연 자취방의 4인 룸메이트 구조일 것이다. 수도권의 높은 집값, 사회 초년생의 경제적 제약, 대학생들의 통학 거리 등을 이유로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하나의 공간을 ‘공동 거주’하게 된다. 마치 캔터베리로 가는 순례자들이 각자의 목적과 출발점을 안고 한 여정에 탑승했듯, 룸메이트들도 저마다 다른 지역, 꿈, 사정, 속내를 안고 한 자취방에 도달한다. 그들은 같은 주소를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판 인물 군상’들이다.
각자의 방은 닫혀 있지만, 냉장고는 공유되고, 화장실은 돌려써야 하며, 간혹 배달 음식을 나눌지 말지를 놓고 머뭇거리게 된다. 어떤 이는 아침형 인간이고, 어떤 이는 야행성이다. 누군가는 친구를 자주 데려오고, 누군가는 철저히 개인 공간을 지키고 싶어 한다. 이런 일상 속 충돌과 조율은 단순한 생활의 불편을 넘어서 서사적 교차점을 만들어낸다. 캔터베리의 순례자들이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듯, 룸메이트들 역시 함께 살아가는 와중에 각자의 이야기, 세계관, 가치가 충돌하고 스며들며 공동의 리듬을 만들어 간다.
더욱이, '캔터베리 이야기'가 "여행 중"이라는 일시적 상황을 설정한 것처럼, 자취방의 룸메이트 생활 또한 대부분 영구적이지 않다. 이들은 학기, 계약, 취업, 이직 등의 이유로 떠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만난 존재’들이다. 이 일시성과 불안정성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독특한 긴장감을 만든다. 가깝지만 가족은 아니고, 멀지만 완전히 타인도 아닌, 이상한 거리감 속에서 공존해야 하는 묘한 공동체. 초서가 묘사한 중세인의 내면과 현대인의 자취 생활은 그렇게 멀지 않다. 시간은 흘렀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율과 충돌, 관찰과 서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당신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교회인과 거짓 수도사, 그 룸메이트는 ‘의외로 착한 욜로족’
'캔터베리 이야기'의 주요 인물 중 다수는 종교적 신분을 지녔지만, 그 실체는 종종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수도사는 청빈과 금욕을 강조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냥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는다. 수녀는 겸손해야 하지만 프랑스어 발음을 뽐내며 자신의 세련됨을 은근히 자랑한다. 초서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신분과 실제 행동의 불일치’를 유쾌하게 꼬집는다. 이 위선은 단순히 비난받아야 할 허위가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취할 수밖에 없던 적응의 형태이기도 했다.
이와 비슷하게, 자취방의 룸메이트 중에도 ‘말과 행동이 다른’ 인물이 있다. 예컨대, 처음 입주할 때 “제가 좀 예민해서 소음에 민감해요”라고 말했던 룸메이트가 사실은 밤새 스트리밍을 틀어놓고 잠드는 유형일 수 있다. 한창 시험 기간에는 “조용히 공부해야 하니까 다 같이 신경 쓰자”고 했던 그가 주말엔 친구들을 불러와 파티를 벌인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이런 룸메이트가 무조건 미움받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주기적으로 야식이나 술을 돌리고, 무거운 택배를 들어주는 소소한 ‘착한 행동’들로 인지도를 쌓는다. 위선과 인간미의 묘한 조합,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 속 거짓 수도사들과 닮은 점이다.
그는 경제관념이 약하지만 돈 계산에는 빠르고, 말은 공손하지만 책임 회피에도 능하다. “형/언니, 그거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지만 실제론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이런 인물은 자취방 안에서 대체로 극단적인 갈등을 피하는 데 능하다는 점이다. 그는 계산적인 사회 감각으로 갈등을 피해 가고, 타인의 심리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큰 충돌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 자취방에서 이 룸메는 은근히 ‘조율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중간하게 웃으며 넘어가고, 모두가 피곤할 때 가볍게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한다.
초서가 그려낸 위선자들이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고, 오히려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처럼, 이 룸메이트도 도덕적 판단보다는 사회적 기술의 결정체로 이해될 수 있다. 자취방이라는 공간은 정답이 없는 생활 속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누가 더 잘 살아남는가’를 보여주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결국 이 룸메는 거짓 수도사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만, 어딘가 정이 가고, 함께 지내는 데 결정적인 불편함은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위선적인 인간’이 아니라 ‘현명한 인간’으로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룸메이트 생활의 역설이며, 인간관계의 오묘한 이중성이다.
기사와 상인의 대립: 방 청소는 권력투쟁이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기사와 상인은 서로 다른 계급과 가치관을 상징한다. 기사는 명예와 전통을 중요시하고, 상인은 실용성과 계산에 능하다. 이 대립은 자취방의 또 다른 고전 구도 “청소파”와 “무관심파”**의 갈등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기사 같은 룸메는 스케줄을 짜고, 청소 도구를 공유하며, ‘생활의 질’을 강조한다. 이들은 룸메 단톡방에 "이번 주는 XX가 화장실 청소하는 거 맞지?"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반면 상인형 룸메는 “그걸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잔소리에 피로감을 느낀다.
이 둘의 충돌은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다. 이는 공동체 내 권력과 규칙의 경계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청소는 공동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지만, 동시에 ‘누가 누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기사형 룸메는 자신이 만든 청결의 질서를 통해 우위를 점하려 하고, 상인형 룸메는 그것이 부담과 간섭이라고 받아들인다. 초서의 시대에도 명예와 실용이 충돌했듯, 자취방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끊임없이 대립한다. 결국 둘 다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고, 양쪽 모두가 틀렸다기보다는 다르게 옳은 것이다. 문제는 그 다름을 어떻게 ‘생활 가능성’으로 번역하느냐는 점이다.
캔터베리에서 자취방까지: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산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완결되어 있지 않다. 누구도 명쾌한 교훈을 주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옳거나 그르지 않다. 각자의 이야기에는 각자의 이유와 입장이 있고, 초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며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자취방의 룸메이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을 판단하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와 맥락이 존재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현관문을 조심히 닫는 룸메, 밤마다 휴대폰으로 속삭이는 룸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를 자주 해 먹는 룸메, 그들의 행동은 모두 하나의 작은 서사를 품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살지만, 동시에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자취방이라는 작은 공간은 그 자체로 ‘캔터베리 순례길’이며, 각자의 삶의 방향이 교차하는 임시의 지점이다. 누군가는 취업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퇴사를 고민하며, 누군가는 연애에 빠지고, 누군가는 인간관계에 지쳐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묘하게 얽히고, 때로는 갈등하며, 가끔은 서로를 위로한다. 초서가 순례자의 입을 빌려 다양한 삶을 보여주었듯, 자취방의 룸메이트들은 우리가 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서사 단위다.
결국 룸메이트 생활은 각자의 이야기가 충돌하는 과정이면서도, 그 사이를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그러했듯, 룸메이트와의 생활도 웃음, 불만, 공감, 묵인이 얽혀 있는 ‘일상 드라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에 휘말리고, 누군가의 하루를 간접적으로 살아낸다. 그리고 언젠가, 이 좁은 자취방의 기억이 인생이라는 순례길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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