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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ESG 경영의 윤리적 기준

by lee-niceguy 2025. 5. 15.

목적론적 윤리와 ESG: 기업의 '선한 목적'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인간 행위의 최종 목적이 ‘행복(eudaimonia)’이라는 전제 위에 있다. 행복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성공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삶의 실현, 탁월성(arete)이르는 삶이다.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선’향해 나아가야 하며,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과 공동체의 번영을 함께 도모해야 한다. 이는 단지 개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와 조직, 나아가 기업의 행동 기준에도 적용될 있는 윤리학의 토대다.

 

관점에서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경영은 단순한 사회적 유행이나 마케팅 수단이 아니라, 기업이 ‘선한 목적’어떻게 설정하고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실천의 문제로 전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은 좋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강조했으며, 이는 기업이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기업의 존재 목적 자체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제조기업이 친환경 공정을 도입하거나 탄소 배출을 감축하기 위한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이윤을 줄이는 단기적 손해처럼 보일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기업의 ‘고유한 덕’실현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목적과 일치하는 행동이라 있다. ESG단순히 외부 평가 지표가 아니라, 기업이 ‘존재하는가’대한 철학적 성찰을 촉진하는 프레임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정당성을 윤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사유의 기초가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ESG 경영의 윤리적 기준

 

중용의 덕과 ESG 판단 기준: 균형 잡힌 결정의 미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하나는 ‘중용(meson)’이다. 중용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 가장 덕스러운 가운데를 선택하는 지혜로운 행위를 말한다. 용기는 비겁함과 무모함 사이의 중용이고, 관대함은 인색함과 사치 사이의 중용이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 단순히 평균값이 아니라, 올바른 이성과 판단에 따라 구체적 상황에 적합한 결정을 내리는 ‘실천적 지혜(phronesis)’산물이라는 점이다.

 

ESG 경영에서도 중용의 덕은 매우 유효한 기준이 된다. 예컨대 기업이 환경 보호를 명분으로 사업을 철수하거나 축소하는 극단적 행위는 현실적 지속 가능성을 해칠 있다. 반면, 이윤을 지나치게 우선시하여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는 태도 역시 ‘탐욕’이라는 극단으로 치우친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식 윤리 기준으로 보면, 기업은 영역에서 균형 잡힌 결정을 통해 '가장 적절한 중간'실천해야 한다.

 

실제로 글로벌 IT 기업들이 클라우드 서버의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데이터센터를 북유럽으로 이전하는 사례는 중용적 결정의 좋은 예다. 이는 에너지 절감과 기술 확장이라는 가치를 균형 있게 고려한 ESG 전략으로 해석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상황 판단과 비례 감각이 뛰어난 판단력에 기반하며, 이는 오늘날 ESG 리스크 평가, 투자 전략, 공급망 책임 관리 다양한 영역에 적용될 있는 윤리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기업이 ESG 실천에서 과도한 이상주의나 무분별한 실용주의를 지양하고, 중용의 덕을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균형점을 찾아갈 때, 진정한 윤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

 

공동선과 사회적 책임: ESG누구를 위한 실천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은 ‘폴리스적인 존재’ 즉,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개인의 탁월성도 공동체 내에서 실현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선(common good)추구는 단순한 공리주의적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본연의 가치를 실현할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ESG 경영의 핵심은 바로 공동선을 실현하는 있다. 환경을 지키는 행위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정의로운 사회의 기반이며, 투명한 지배구조는 신뢰와 공정성을 유지하는 조건이다. 기업이 ESG실천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단순히 투자자나 소비자만을 위한 행동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ESG아니라 ‘윤리적 포장’불과하다.

 

예를 들어, 기업이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폐광 지역에 재생에너지 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례는 ESG사회적 책임과 공동선 실현의 전형이다. 이는 기업이 자사의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번영에 책임이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실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런 맥락에서 기업의 책임을 ‘선택 가능한 선의 극대화’본다. ESG단지 ‘평가받기 위한 요소’아니라, 기업이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명제를 중심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행동 양식’이어야 한다. 철학적 기반이 없다면 ESG쉽게 시장 논리에 편승한 장식품으로 전락할 있다.

 

실천적 지혜와 지속 가능성: 탁월함은 반복된 선택에서 비롯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이에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실천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탁월함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습관이며, 반복적이고 일관된 행위를 통해 몸에 배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반복해서 옳은 행동을 함으로써 옳은 사람이 된다”강조하며, 윤리적 삶은 단기적 목표가 아닌 장기적 방향성의 산물임을 설파한다.

 

점은 ESG 경영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ESG단기간의 성과나 일회성 캠페인이 아니라, 기업의 모든 의사결정과 행동 방식에 지속해서 스며들어야 가치체계이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플라스틱 포장재를 생분해성 소재로 대체하고, 이를 전사적인 시스템으로 내재화하는 것, 혹은 협력사 선정 기준에 윤리 경영 항목을 반영하여 전방위적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의 결과물이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프로나이시스(phronesis)’, 실천적 지혜는 이론적 이상이 아닌 구체적 행위와 판단에 기초한다. ESG 전략 또한 이상적인 비전이 아닌, 순간의 선택에서 기업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윤리적 판단이 핵심이다. 어떤 행동이 장기적으로 사회와 환경, 그리고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고려하며 결정하는 것은 탁월한 기업 윤리의 실천이자, ESG궁극적 지향점이다.

 

결국 '니코마코스 윤리학'ESG 경영을 단순한 도구적 수단이 아닌, 기업 존재의 윤리적 완성 과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지속 가능성은 ‘남보다 잘하는 것’아니라 ‘꾸준히 바르게 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이는 윤리적 탁월성의 체현이다. ESG진정한 윤리적 경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철학적 기반 위에 ‘지속적 실천’이라는 정직한 반복이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