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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탈레스'의 물 철학과 스타트업 '피벗' 전략

by lee-niceguy 2025. 5. 7.

1. 모든 것은 물에서 비롯되었다: 탈레스 철학의 유동성 이해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밀레토스에서 활동한 철학자 탈레스는 서양 철학의 시초로 불린다. 그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바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이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선다. 탈레스가 강조한 것은 물이라는 물질의 유동성과 순응성,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변화의 원리였다. 물은 형태를 고정하지 않고, 어떤 그릇이든 담기며, 때로는 힘을 발산하고, 때로는 고요하게 흐른다. 하지만 그 모든 모습 속에서도 ‘물’이라는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 철학은 오늘날 스타트업의 전략적 변화, 특히 피벗(Pivot)의 개념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스타트업은 본질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불확실한 사용자 반응, 자본의 한계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한다. 초기 아이디어가 시장과 맞지 않거나, 사용자 니즈가 예상과 어긋날 경우, 스타트업은 자신의 제품·서비스·비즈니스 모델을 전면적으로 전환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이를 ‘피벗’이라 부른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전환이 완전한 해체가 아니라 본질을 유지한 채 방향만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마치 탈레스가 본 물의 철학과 같다. 물은 변화하지만 변하지 않고, 흐르지만 본질은 잃지 않는다. 탈레스는 물이 때로는 얼음이 되고, 증기가 되며, 바다와 구름, 폭우와 샘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도 이와 같아야 한다. 처음 의도한 서비스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며 형태를 바꾸는 시작일 수 있다. 피벗은 실패가 아니라, 철학적 생존의 기술이다. 탈레스는 물의 본질을 이해한 자만이 자연의 진리를 통달할 수 있다고 했고, 스타트업도 자기 본질(가치, 철학,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때만 생존할 수 있다.
 

'탈레스'의 물 철학과 스타트업 '피벗' 전략

 

2. 스타트업의 유동성 전략: 고정 관념을 녹이는 ‘피벗’의 힘

 
피벗이란 단순히 제품 기능을 조금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비즈니스 구조, 고객 정의, 수익 모델까지 근본적인 틀을 재조정하는 전략적 결정이다. 탈레스가 물의 유동성과 순응성을 통해 자연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설명했듯, 스타트업도 시장의 흐름 속에서 고정 관념을 녹이고 끊임없이 재형성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유연함이 아니다. 피벗은 무비판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분석과 직관에 기반한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이다.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사례 중 하나는 인스타그램이다. 원래 ‘Burbn’이라는 위치 기반 소셜 앱으로 시작했지만, 사용자들이 사진 기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자 핵심 기능만 남기고 나머지를 제거했다. 이 과감한 ‘축소형 피벗’은 결국 플랫폼의 성공을 이끌었다.

이는 탈레스가 말한 물의 또 다른 성질(불필요한 걸 흘려보내고, 필요한 곳으로만 스며드는 지혜)과도 같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싸우지 않는다. 돌아간다. 흘러간다. 스며든다. 스타트업에 피벗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하지 않고, 본질을 남기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선택의 미학이다.
 
탈레스는 물이 모든 것에 스며들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니며, 한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스타트업도 자신을 한정된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처음 정한 고객, 수익 구조, 핵심 기능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그것을 끝이라 생각하지 않고 ‘본질은 무엇인가’를 묻고, 다시 흐르는 것이 피벗이다. 피벗은 기술 전략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결과이기도 하다.
 

3. 본질을 지키며 흐르는 법: 탈레스 철학과 정체성 유지의 균형

 
스타트업의 피벗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탈레스의 물 철학이 시사하는 점도 같다. 그는 물이 끊임없이 상태를 바꾸며 변화하더라도, 그 변화 속에서 잃지 않는 본질이 ‘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수증기, 얼음, 비, 바다 그 어떤 상태에 있더라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벗이 성공적인 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그 변화가 단지 생존을 위한 무작정의 적응이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한 채 방향을 수정하는 깊은 사유의 결과여야 한다.
 
스타트업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디어 그 자체가 아니다. 사용자의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정직하게 추구하는 태도와 철학이다. 초기 서비스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는가’이다. 피벗이 이 질문에 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회피가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한 성장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실패한 스타트업은 변화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유행하는 기능을 덧붙이다가 핵심이 흐려지고, 투자자의 눈치를 보느라 고객의 목소리를 놓치고, 경쟁사의 움직임에만 반응하다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다. 이런 피벗은 사실상 해체에 가깝다. 탈레스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물이 물이기를 멈춘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즉, 변화 속에서 존재감을 유지하지 못한 스타트업은 단순히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좋은 피벗은 핵심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갈아내는 과정이다. 때로는 더 단순하게, 때로는 더 깊게, 핵심만을 남기고 외형은 바꾼다. 이는 마치 물이 돌을 뚫는 방식과 같다. 물은 강하지 않지만, 방향을 잃지 않기에 결국 돌을 뚫는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피벗은 도약의 발판이 된다. 그렇기에 진정한 전략가는 외부 변화보다 내부 철학을 먼저 확인한다. 피벗은 질문이다. “지금의 우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본질에서 시작된다.
 

4. 살아남는 자는 누구인가: 물처럼 피벗하는 조직의 미래

 
탈레스는 자연을 단지 관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간 삶의 원리와 우주의 질서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물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그의 주장에는 단순한 물질적 의미를 넘어선 유기적 순환과 유연한 적응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스타트업의 피벗 전략 역시 이와 같다. 단순히 시장의 위협을 피하는 생존 기술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진화의 전략이어야 한다.
 
좋은 피벗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방향 전환을 통해 더 큰 생태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초기 시장이 좁거나, 사용자 반응이 미지근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에 결함이 있을 때 많은 기업은 ‘포기’를 택한다. 하지만 탈레스가 말한 물처럼 유연하게 흐를 수 있는 기업은 방향을 틀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물이 산을 만나면 흐르기를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일시적으로 고이되, 언젠가 다시 흐른다.

스타트업도 이처럼 잠시 멈추거나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유연성은 단지 빠른 변화가 아니라, 방향을 기다릴 줄 아는 전략적 인내와 연결된다. 실제로 성공한 많은 스타트업은 단 한 번의 피벗이 아닌, 수차례의 실험과 방향 조정을 거쳐 성장했다. 넷플릭스는 DVD 대여 사업에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다시 자체 콘텐츠 제작사로 변신했다. 이 모든 과정은 그들이 ‘이용자 중심의 콘텐츠 경험’을 추구하는 본질적 비전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피벗은 기술이나 제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의 문제다. 시장이 변해도, 시대가 달라져도, 고객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든 그 기업은 물처럼 다시 흐를 수 있다.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시간이고, 가장 강한 것은 물이다”라고 했다. 스타트업 세계에서도 이 말은 유효하다. 시간을 두고 자기 철학을 갈고닦고, 물처럼 상황을 흡수하고 흐를 줄 아는 기업, 그것이 곧 진짜로 살아남는 존재다. 피벗은 그래서 두려움이 아니라 기회이며, 철학 없는 변화는 탈레스가 경계한 ‘혼돈’일 뿐이다. 살아남는 자는 물처럼 변화하며, 결코 본질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탈레스가 스타트업에 전하는 마지막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