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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부모 탓을 멈췄다

by lee-niceguy 2025. 4. 24.

1. 부모와 죄의식 -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질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단지 형제간의 갈등이나 아버지의 살해라는 사건을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 책임, 자유, 사랑, 죄책감을 총체적으로 묻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테마 중 하나는 바로 ‘부모’에 대한 태도다. 소설 속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무책임하고 탐욕스럽고 천박한 인물이다. 그는 자식들을 방치하고, 타락한 유흥 속에서 삶을 소비하며, 부성의 책임을 거의 방기한 인물이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세 형제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거부하거나 용서하려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 삶 속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도 한때는 내 삶의 실패와 고통의 원인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왜 나는 이렇게 자랐을까? 왜 나의 감정은 늘 불안하고 결핍으로 가득했을까? 왜 더 좋은 환경, 더 안정된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은 분노와 한탄으로 이어졌고, 결국 부모에 대한 판단과 비난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특히 알료샤와 이반의 대화를 따라가며,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로부터 무엇을 받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어떤 조건이 있었던가?”라는 존재의 연쇄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해가 내 안에서 피어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처한 실존의 조건이 얼마나 복잡하고,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배경, 가정의 영향을 구분하기 어려운지를 날카롭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는 결코 “부모가 잘못했으니 나는 무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끝까지 직면해야 하며, 그 책임은 종종 사랑과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부모 탓을 멈췄다

 

2. 드미트리와 이반 - 분노와 회피의 두 얼굴

 
소설 속 첫째 드미트리와 둘째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보여준다. 드미트리는 감정적으로 격렬하게 아버지를 미워한다. 그는 과거에 받은 상처와 유산 문제를 둘러싼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이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아버지에게 전가한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모든 부정의 원인이다. 반면 이반은 철학적이고 이성적이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상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혐오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그 냉철함은 곧 무기력과 죄책감, 정서적 거리감이라는 또 다른 감옥을 만든다.
 
이 두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모를 탓한다. 드미트리는 감정적 직면을, 이반은 지적 회피를 택한다. 그리고 나는 이 둘 사이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한편으로는 부모의 실수와 무관심에 분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냉정하게 해석하며 감정의 충돌을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두 방식 모두 결국 나를 정체된 상태로 머무르게 만들었고, 삶의 방향성을 외부 탓에 맡기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늘 ‘왜 나에게 이런 부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지, ‘나는 그런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드미트리의 분노가 결국 파괴로 귀결되며, 이반의 회피는 광기의 문턱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부모에 대한 단선적인 비난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는 상처를 넘어서려는 구도적 갈망이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이 형제들의 갈등은 단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서사의 왜곡과 화해를 향한 인간 본성의 구조를 드러낸다.
 

3. 알료샤의 사랑 - 용서의 또 다른 이름

 
세 형제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단연 알료샤다. 그는 수도사로서 신앙과 선의, 이해와 연민을 기반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표도르의 타락과 무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방임이나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을 이해하려는 철학적 실천자로 존재한다. 알료샤는 형제들과 달리 부모의 부재나 학대, 왜곡된 권위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고, 그 관계를 넘어 새로운 윤리적 관계를 창조해 낸다. 그에게 있어 부모란 단지 유전적·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거울로 기능하는 존재다.
 
그는 아버지의 결점과 폭력성을 인정하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내면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알료샤는 단순히 착하고 순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선택적으로 반응하며,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위한 관용을 실천하는 윤리적 지성인이다. 나는 그를 읽으며 처음으로 ‘용서’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기 삶을 진정으로 회복하기 위한 깊은 주체적 선언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부모를 탓한다는 것은 그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여전히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을 ‘이해하려는 나’를 발견해야만 했다.
 
알료샤의 태도는 나에게 정서적으로도 강한 울림을 주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되거나, 종교적 도피에 빠지지 않으며,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알료샤의 용서는 “그대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고자 한다”는 결단에 가깝다. 이것은 회피가 아닌 정면 응시의 용기다. 알료샤를 읽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부모를 미워함으로써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지만, 그 미움이야말로 내게 가장 큰 족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알료샤는 궁극적으로 부모에 대한 책임 추궁을 넘어, 자기 삶에 대한 절대적 주인의식으로 나아간다.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나의 조건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것 위에 나만의 세계를 세울 수 있다.” 알료샤의 이런 태도는 나에게 진정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거리 두기가 아니라, 감정적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새로운 의미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첫걸음이라는 걸,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4.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 - 멈춤에서 시작된 독립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덮고 난 뒤, 나는 오래된 분노의 감정을 다시 꺼내어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감정은 여전히 정당했지만, 그 감정이 내 삶을 지배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그들 또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한다. 모든 인간은 상처의 연속선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 누구도 자기 고통에만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점에서 모두 불완전하고도 평등하다.
 
이해란 상처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이며, 때로는 그 상처를 내 삶의 재료로 삼는 선택이다.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도 나와 같은 결핍의 존재였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인식은 내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나는 이제 부모를 다시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상적인 부모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파괴적인 원흉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삶의 책임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나를 억누르는 짐이 아니라,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해 갈 수 있는 자유로 느껴졌다. 부모를 탓하는 멈춤은 곧 나 자신으로서 시작하는 독립의 문턱이었다. 그리고 그 문턱은 차가운 단절이 아니라, 성숙과 통합, 이해와 거리두기가 함께 공존하는 성인의 자리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단지 한 가정의 비극을 다룬 소설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미로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서사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부모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 안에서 나를 구원하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제는 더 이상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부모 탓을 멈췄다는 말은, 곧 내 인생을 진정으로 시작했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 조용한 결심에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