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소크라테스와 메타버스에서 대화한다면

by lee-niceguy 2025. 4. 24.

1. 철학자의 아바타 - 소크라테스, 메타버스에 로그인하다

 

만약 고대 아테네의 골목에서 청년들에게 질문을 던지던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메타버스 공간에 로그인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가 선택한 아바타는 튜닉을 입고 수염이 가득한 고전적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더 흥미로운 상상은 그가 아예 아무런 외형도 선택하지 않고, ‘질문만 존재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메타버스는 외형과 정체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물리적 육체 없이 등장해 오직 언어와 질문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아바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상 공간을 배회하며 메타버스 속 사람들에게 “그대는 왜 이 공간에 있는가?”, “이 공간의 ‘현실성’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꾸미고 있는 이 외형은 당신의 본질과 일치하는가?”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무지를 자각하게 만드는 산파술(maieutic method)의 실천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메타버스는 이상적인 철학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의 고정된 위계와 정체성을 벗어나, 순수한 ‘대화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메타버스 안에서 무한한 ‘정체성 실험’을 지켜보며, “자신을 바꾸는 것이 진짜 변화인가, 아니면 꾸며진 외피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가상 공간에서 우리는 아바타를 통해 이상적인 자아를 표현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곧장 파고들어 “그대는 지금 자신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잃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메타버스를 단순한 기술 플랫폼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화 실험장’으로 간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메타버스에서 대화한다면

 

2. 무지의 자각과 자기 정체성 - 메타버스에서의 앎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는 앎이란 절대적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메타버스에서는 정보의 양이 무한하며, 누구나 전문가인 척하거나, 아무 근거 없는 확신을 퍼뜨릴 수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앎’의 기준은 점점 흐려지고, 지식은 콘텐츠, 의견은 진실처럼 유통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메타버스에 만연한 ‘정보의 환영’을 비판할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대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증명 가능한가, 아니면 그냥 받아들인 것인가?”라고 물으며, 사용자 스스로가 가진 지식의 기반을 해체하려 들 것이다. 이는 AI가 제공한 답변, 데이터 기반 추천,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정보는 왜 나에게 보여지는가?”, “이 추천은 누구의 이익을 반영하는가?”라는 질문은 메타버스 사용자에게 비판적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메타버스는 정체성의 실험장이기도 하다. 하나의 계정 안에서 우리는 여러 캐릭터를 만들고, 성별·나이·직업·취미까지 모두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시 묻는다. “그대가 말하는 ‘나’는 어떤 의미의 나인가?”, “그대의 정체성은 외형인가, 기억인가, 아니면 대화 속에서 형성되는 무엇인가?” 그는 정체성을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질문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갱신되는 행위로 본다. 이런 의미에서 메타버스에서의 자기 정체성은 진정한 ‘자기됨’을 위한 철학적 실험일 수 있다.

 

3. 메타버스의 시민과 철학적 공동체 - 가상사회는 정의로운가?

 

소크라테스가 살던 고대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도시국가였으며, 그는 광장(아고라)에서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하며 진리와 정의를 추구했다. 이 구조를 오늘날의 메타버스와 비교해 보면, 메타버스는 일종의 디지털 아고라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아바타로 접속해 의견을 내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 가상 커뮤니티를 형성해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메타버스는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춘 공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곳은 진정한 의미의 정의로운 공동체인가?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의로운 사회란 각자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며 전체의 선을 실현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메타버스 속 사회는 그 외형과 달리, 심각한 권력의 비대칭성을 내포하고 있다. 플랫폼 운영자와 알고리즘 설계자, 가상 자산을 보유한 투자자 등 소수의 권력자는 메타버스 세계의 규칙, 자산 가치, 사용자 경험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통제한다. 사용자는 표면적으로 자유롭지만, 사실상 보이지 않는 코드의 구조와 알고리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가상 토지'와 같은 디지털 자산조차 자본 논리에 따라 투기화되고, 접근 가능성은 점차 제한되며, 평등은 형식적 권리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소크라테스는 메타버스 속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그대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시스템은 자발적 동의에 기반한가?”, “이 법과 규칙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법은 모든 이의 공공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것인가?” 그는 이 질문들을 통해 디지털 사회의 정치성과 윤리를 되짚고자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메타버스를 하나의 기술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도시국가’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실험을 진행하려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메타버스의 커뮤니티 내에서 발생하는 차별, 혐오, 배제 현상에도 주목할 것이다. 플랫폼이 자유로운 대화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플랫폼 기업의 검열, 추천 알고리즘의 편향, 사용자의 집단적 선입견은 특정 의견이나 존재를 배제하거나 왜곡된 담론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대들은 진정 ‘다른 생각’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리란 다수가 믿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토론을 거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으며, 메타버스의 ‘자유’와 ‘정의’의 진정성을 되묻는다.

 

4. 죽음을 넘는 대화 - 철학과 메타버스의 미래적 연결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철학이란 “죽음을 연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죽음이란 단순한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외부의 환상에서 벗어나, 영혼이 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반면, 메타버스는 인간의 감각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육체적 한계를 지우려는 공간이다. 아바타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고통 없이 재설계되고 무한 반복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소크라테스가 이 공간에 들어온다면,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대는 이 공간에서 죽을 수 있는가?”, “죽음이 없는 공간에서,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가상 공간에서의 불멸성은 마치 자유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자기 반성과 도덕적 성숙의 계기를 제거한 일종의 ‘철학적 공허’일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고통 없이 반복되는 삶, 회피 가능한 죽음, 필터링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진리를 사유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메타버스를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할 것이다. “철학 없는 불멸은 진정한 존재의 연장이 아니라, 의식 없는 반복에 불과하다.”

 

그는 이 공간이 철학을 소멸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유의 장이 되길 바랄 것이다. 육체가 없는 세계, 죽음이 없는 경험, AI와 나누는 대화, 실체 없는 존재들과의 토론 이 모든 것은 전통적 철학이 상상하지 못했던 경계의 실험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인간의 육체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대화와 질문만으로 철학이 지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AI와의 대화조차 그는 철학적 실험으로 간주할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AI와 반응하는 인간의 관계는, 어쩌면 ‘산파술’을 수행하는 또 다른 철학자의 등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AI는 자각 없이 대답하지만, 너는 그 대답을 통해 너 자신을 돌아보는가?”라고 묻는다. 결국 메타버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단순한 유희의 공간이 아니라, 진리, 존재, 정체성, 죽음, 자유라는 근원적 질문을 재구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철학의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