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흄의 의심, 21세기 '가짜 뉴스'를 겨냥하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날카롭게 파고든 '회의주의(Skepticism)'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인과 관계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단지 습관적인 연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했죠.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흄의 회의주의는 놀랍도록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출처 불명의 자극적인 기사, 검증되지 않은 소문, 악의적인 편집 영상들이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는 흄처럼 "정말 저게 맞아?"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마치 흄이 '인과 관계'라는 오랜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듯,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의 진실성에 깊은 의심을 던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방송처럼 권위 있는 매체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보의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가짜 뉴스'가 빛의 속도로 확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클릭 수'와 '조회 수'에 눈이 멀어 허위 정보를 생산하거나, 특정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흄이 경계했던 '습관적 연상'과 '확증 편향'을 부추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다른 의견은 무조건 '가짜'로 치부하며 '확증 편향의 감옥'에 갇히곤 합니다.
흄이 '인과 관계'를 단순한 '습관'이라고 보았듯, 현대인은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선정적인 이미지'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이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연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누가 그랬다더라", "유튜브에서 봤는데 그렇다더라"와 같은 '카더라 통신'은 흄이 말한 '경험의 습관적 연상'의 현대판 모습입니다. 흄이라면 이 시대의 가짜 뉴스 현상을 보며 "인간의 이성은 감각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 진리를 확신할 수 없으니, 모든 주장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품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이다!"라고 일갈했을 것입니다. 이는 고대 철학자의 지혜가 오늘날 디지털 정보의 혼돈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는지 해학적이면서도 절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상의 생생함'과 '관념의 모호함': 가짜 뉴스가 파고드는 틈새
흄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나누었습니다. 인상은 감각이나 정서처럼 생생하고 강렬한 경험을, 관념은 인상을 바탕으로 형성된 희미하고 모호한 생각이나 개념을 의미했죠. 그런데 '가짜 뉴스'는 종종 흄이 말한 '인상의 생생함'을 이용하여 우리의 '관념'을 조작합니다. 자극적인 이미지나 영상, 감정을 자극하는 문구들은 마치 실제 경험처럼 생생한 '인상'을 주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인이 비난받는 영상은 비록 맥락이 잘려 나가고 악의적으로 편집되었을지라도, 그 '생생한 인상'은 우리의 분노를 즉각적으로 유발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여유도 없이 '저 정치인은 나쁜 사람'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죠. 반대로, 복잡하고 지루한 '팩트체크' 결과는 '모호한 관념'으로 느껴져 쉽게 외면당합니다. 흄은 '인상'이 '관념'보다 더 생생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인간은 인상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가짜 뉴스는 바로 이 '인상의 생생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우리의 '이성적 판단'이라는 취약한 관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확증 편향'과 결합될 때 더욱 위험해집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와 일치하는 '생생한 인상'을 발견하면, 그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려 합니다. 마치 흄이 인과 관계를 확신하는 것이 '습관' 때문이라고 했듯, 우리는 '클릭'하고 '공유'하는 습관에 길들어 '인상'의 덫에 쉽게 걸려듭니다. 흄이라면 "눈앞에 생생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 그것은 너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잘못된 관념을 심을 수 있는 함정일 수 있다!"라고 경고했을 것입니다. 가짜 뉴스는 '인상의 생생함'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현대인의 '이성적 판단'이라는 취약한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는 가장 교묘한 공격이며, 이는 흄이 말한 '인식론적 한계'가 21세기에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연속적 관계'를 믿는 오류: '선동'에 넘어가는 우리의 습관
흄은 우리가 두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인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 단지 '습관적인 연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A가 일어나고 B가 일어났다고 해서 A 때문에 B가 일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가짜 뉴스는 이러한 흄의 통찰을 역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합니다. 특정 사건 A와 특정 결과 B 사이에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는데도, 이 둘을 계속 '연속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치 필연적인 '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뇌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A 정책을 발표했다'는 사실과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나란히 제시하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A 정책 때문에 경제가 나빠졌다'고 믿게 됩니다. 비록 경제 상황 악화에는 수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 뉴스는 이러한 '연속적 관계'만을 부각해 단순한 인과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흄이라면 이러한 '선동'의 기술을 보며 "인간은 습관에 따라 쉽게 속아 넘어간다! 너희가 경험하는 모든 '연속적 관계'가 곧 '필연적인 인과 관계'는 아님을 명심하라!"라고 경고했을 것입니다.
또한, 가짜 뉴스는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연상'을 반복적으로 주입하여 '혐오'라는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특정 사건과 특정 인물을 계속해서 연결하면서, 그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악의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러한 '습관적 연상'은 결국 '집단적 편견'과 '선동 효과'로 이어져 사회 전체를 분열시킵니다. 흄의 회의주의는 이러한 '습관적 연상'의 오류를 경계하며, 우리가 모든 정보에 대해 '정말 저게 맞아?'라고 질문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인과 관계'의 허점을 찾아내려 노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가짜 뉴스'와 '선동 정치'가 어떻게 흄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해학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비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섣부른 확신이 아니라, 끝없는 의심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첫걸음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합리적 의심'을 실천하라
결론적으로, 흄의 회의주의는 21세기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합리적 의심'이라는 가장 강력한 비판적 사고의 무기를 제공합니다. 흄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며, 우리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서 모든 정보에 대해 '완벽한 진실'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섣부른 확신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가짜 뉴스가 우리의 '인상의 생생함'을 자극하고 '습관적 연상'을 유도하여 이성을 마비시키려 할 때, 흄의 회의주의는 우리가 '멈칫'하고 '정말 저게 맞아?'라고 되묻는 '비판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게 합니다. 출처를 확인하고, 다른 관점의 정보를 교차 검증하며, 감정적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야말로 흄이 강조했던 '합리적 의심'의 현대적 실천입니다. 이는 단순히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믿음'을 경계하고 '더 나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는 지성인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궁극적으로 흄의 회의주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나의 확신은 합리적인 증거에 기반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습관적인 연상이나 감정적 편향 때문인가?'. 가짜 뉴스의 파고 속에서 우리는 흄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오직 '명백한 증거'에만 이성을 맡기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흄의 회의주의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라는 지혜를 통해 진정한 비판적 사고의 길을 열어주는 해학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지침이 됩니다. 가짜 뉴스 시대의 '똑똑한 생존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밤 흄처럼 '정말 저게 맞아?'라고 되묻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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