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자’의 자유 정신과 현대 이직자들의 갈증
'장자'는 도가사상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유희적인 색채를 지닌 철학서로, 세속의 기준과 명예,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장자는 현실 정치와 체제의 구속, 이름과 직책에 집착하는 삶을 ‘작은 삶’이라 부르며, 오히려 무용해 보이는 인물이나 탈속한 존재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러한 장자의 정신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이직’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현대 직장인들과 깊은 접점을 이룬다.
오늘날 많은 직장인은 단지 돈이나 직함이 아니라, 자기다움, 자율성,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이직을 선택한다. 마치 장자가 이야기한 “무위(無爲)”의 삶처럼, 억지로 적응하고 버텨야만 했던 체제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장자는 물고기가 물을 잃으면 죽고, 사람이 자유를 잃으면 병든다고 말한다. 이는 오늘날 조직에 갇힌 이들이 겪는 소진, 무기력, 직무 우울 등과도 이어지는 감정이다. 이직자들은 더 나은 연봉만이 아니라, 더 깊은 호흡, 더 자연스러운 자기 삶을 꿈꾸며 움직인다. 그들은 장자가 말한 “거대한 물결 속 작은 배가 아니라, 구름을 타고 떠도는 붕새(鵬鳥)”가 되기를 갈망한다.
2. 거대한 붕새와 ‘자기 서사’를 찾는 사람들
'장자'의 유명한 비유 중 하나는 ‘소요유(逍遙遊)’ 편의 붕새 이야기다. 붕새는 거대한 바다에서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새로, 참된 자유와 경계를 넘는 존재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작은 참새는 붕새를 비웃으며, “나는 나무에서 나무로만 날아다녀도 충분한데 왜 그렇게 멀리 가느냐”고 묻는다. 장자는 여기서 큰 자유를 꿈꾸는 자와, 작은 현실에 만족하는 자를 대조하며, 소우주에 갇힌 자의 비판이 큰 꿈을 가로막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직자들은 종종 이 붕새와 같다. 그들은 현재 속한 조직에서 정해진 루틴과 틀에 맞춰 살아가기보다는, 더 넓은 가능성의 지평을 향해 도약하려 한다. 주변에서는 “지금 직장이 어디가 부족하냐”, “그만두면 후회한다”, “경력 끊긴다”는 말을 던지지만, 이직자는 그 말을 듣고도 결국 자신만의 ‘높은 하늘’을 향해 움직인다. 이직은 단지 직장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삶의 서사를 바꾸고, 자아를 다시 서술하려는 용기 있는 자기 재정의의 과정이다.
장자가 붕새를 그려낸 이유는 단순히 먼 곳을 날아가는 새를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작은 바람과 조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존재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현대의 이직자들 역시 타인의 시선, 타성적인 조직 문화, 안정만을 중시하는 사회 흐름을 넘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동기와 삶의 방향을 기준으로 선택을 한다. 이 모습은 장자가 말한 ‘자기중심의 자유(自得之遊)’와 정확히 겹쳐진다.
3. 유용함을 넘어선 무용지용 - ‘쓸모없음’의 자유
장자는 '인간세(人間世)', '산목(山木)' 등의 편에서 반복적으로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를 강조한다. 세속적 기준에선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존재야말로 오히려 자유롭고 침해받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존재라는 역설이다. 예를 들어, 가지가 뒤틀리고 휘어져 목재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는 아무도 베어가지 않기에 숲속에서 수백 년을 살아간다. 장자는 이 나무를 찬양하며, 이익과 효율의 논리로만 평가되지 않는 존재의 가능성과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무용한 존재’는 쓸모없기 때문에 오히려 해를 입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오래 살아남는다.
오늘날 직장을 떠나는 이들은 종종 사회로부터 묻는다. “이직하면 뭘 할 건데?”, “그 회사 없이 네가 뭘 할 수 있어?”, “그만두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 이 질문들의 이면에는 철저하게 ‘유용성’이라는 잣대가 숨어 있다. “너는 구조 없이도 쓸모 있는 존재냐?”는 질문, 그것이 바로 사회가 이직자에게 던지는 무언의 압박이다. 하지만 장자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나무는 집을 짓는 데는 쓸모없을지 모르나, 그 그늘 아래에선 아이들이 쉬고, 노인들이 햇볕을 피한다.” 즉, 존재의 쓸모란 체계나 조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현대 이직자들이 조직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단순히 연봉 상승이나 직급 이동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점점 ‘유능한 부속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에 주도권을 되찾으려 한다. 그 주도권은 때로는 ‘지금은 무용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무용한 삶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자기다운 선택이 된다. 장자의 사유에 따르면, ‘쓸모없음’은 단지 유용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이직자는 바로 이 자유를 택하는 자이며, 그것은 겉보기에 낭비처럼 보여도 내면에서는 깊은 자기 회복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4. 장자의 ‘자연’과 현대의 직업 정체성 회복
'장자'의 세계관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고 본연의 흐름에 따르는 삶, 자기 본성을 따라가는 방식의 삶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직업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직책인지, 얼마를 버는지를 통해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장자는 그렇게 외부가 설정한 정체성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출발한 삶의 리듬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았다.
현대의 이직자들은 바로 그 외부의 ‘정체성 틀’에 피로감을 느낀다. 대기업, 연봉, 복지 같은 조건들은 처음엔 자긍심을 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삶과 정체성이 기업 문화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온다. 그래서 이직자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가?”, “일하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한다. 장자가 말한 ‘천명에 따르는 삶’, ‘외물(外物)에서 벗어나는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오늘날 이직자의 내면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직은 단순히 새로운 회사로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과 철학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 자기중심의 삶을 향한 탈주선이다. '장자'에서 “긴 꼬리를 버리고 진흙탕에 눕는 거북”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궁궐에서 존귀하게 모셔지는 죽은 거북보다, 진흙 속을 자유롭게 기는 살아 있는 거북이 낫다는 우화는, 사회적 위상보다 살아 있는 감각과 자기 방식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직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엔 ‘무모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무모함 속에는 자기 삶을 회복하려는 근원적 열망이 담겨 있다. 장자는 말한다. “그저 흐르는 대로 흐르고, 그저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나는 것.”이 말은 표류가 아니라 방향 있는 유영이다. 오늘의 이직자들은 자기만의 붕새가 되어, 구조화된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서사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야말로 장자가 꿈꿨던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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