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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순자 악의 본성, 악플러들의 심리를 파헤치다

by lee-niceguy 2025. 6. 7.

1. 순자의 성악설, 악플러 현상에 드리운 그림자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며, 이러한 욕망을 그대로 두면 다툼과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그는 인위적인 노력, 즉 교육과 '례'를 통해 악한 본성을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죠.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순자의 이러한 통찰이 오늘날 '악플러' 현상에서 섬뜩하게 재현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순자적 '악의 본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거대한 실험장이 된 듯합니다.
 
순자라면 악플러들의 행태를 보며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본래의 악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가! '례'가 무너진 곳에서 인간의 본성은 이토록 추악하게 드러나는구나!"라고 개탄했을 것입니다. 오프라인 사회에서는 사회적 시선과 법적 제약이라는 '례'에 의해 억눌렸던 이기심과 공격성이,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이라는 면죄부를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입니다. 댓글 창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개인의 욕망이 아무런 통제 없이 표출되는 무대로 변모했고, 이는 순자가 경고했던 '욕망의 무한한 확장'이 가져오는 혼란과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악플러 현상은 단순히 일부 일탈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이 제시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이 현대적 환경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을 비방하고 혐오를 표출하는 행위는, 순자가 말한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욕망과 이익 추구, 그리고 남을 해치려는 본능적 충동이 '례'라는 장치가 부재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악플러 현상은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현대적 주석이자, 디지털 시대에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거울입니다.
 

순자 악의 본성, 악플러들의 심리를 파헤치다

 

2. 악플러의 욕망: 인정 투쟁인가, 순수한 악의인가

 
순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욕망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욕구를 넘어, 남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고,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인정 투쟁의 욕망까지 포함합니다. 악플러들의 심리를 파헤쳐 보면, 이러한 순자적 '욕망'이 다양한 형태로 발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을 비난하고 공격함으로써 얻는 일시적인 우월감, 자신의 불행이나 열등감을 타인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는 대리 만족, 혹은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는 순수한 악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순자라면 악플러들의 이러한 행태를 타고난 욕망의 발현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이 온라인에서 뒤틀린 형태로 표출되거나, 혹은 타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는 '인정받고 싶다'는 근원적인 욕망이 '례'에 의해 순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뒤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악플러는 자신만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타인을 심판하려 들지만, 사실 이는 자신의 숨겨진 열등감과 불안정한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공격적인 욕망의 표출인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알 수 없는 타인에게 무차별적인 혐오와 비난을 퍼붓는 행위는 순자가 말한 '욕망의 경쟁'이 디지털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치닫는 모습입니다. 마치 정해진 규칙 없이 싸우는 싸움꾼처럼, 악플러들은 '례'가 없는 온라인의 황야에서 자신의 욕망을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려 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어떠한 도덕적 제약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순수한 악의'로까지 발전하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가장 어두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해학적이면서도 씁쓸한 현대 사회의 단면입니다. 결국 악플러들의 심리는 순자가 말한 '욕망'이 '례'를 만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3. 례의 부재와 익명의 가면: 악플러의 면죄부

 
순자 철학에서 '례'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화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장치입니다. '례'는 단순히 예절을 넘어, 사회적 규범, 도덕률, 제도, 교육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통제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 특히 익명성이 보장되는 댓글 창에서는 이러한 '례'가 현저히 약화하거나 아예 부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익명의 가면은 악플러에게 '례'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를 제공합니다.
 
오프라인 사회에서는 타인의 시선, 사회적 평판, 그리고 법적 처벌이라는 '례'의 강력한 통제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례'를 통해 본성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선한'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익명성은 이러한 '례'의 감시망을 무력화시킵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안도감 속에서, 악플러는 평소 억눌러왔던 부정적인 감정이나 공격적인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합니다. 순자라면 익명의 댓글 창을 보며 "저 가면 뒤에 숨은 자들이여, '례'가 없는 곳에서 인간의 본성은 이토록 나약하게 무너지는구나! 익명성은 그들에게 본래의 악한 모습을 드러낼 자유를 주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일지니!"라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디지털 공간의 특성상 피드백이 즉각적이고 단편적이며, 직접적인 대면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는 '례'가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인간적 유대감'과 '상호 이해'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익명의 악플러는 자신이 던진 한마디의 말이나 글이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며, 이는 '례'를 통해 길러져야 할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의 부재를 심화시킵니다. 결국,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은 악플러들은 '례'라는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악한 본성을 마음껏 드러내며, 이는 순자가 경고했던 '례의 부재가 가져오는 혼란'이 디지털 시대에 재현되는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현상입니다.
 

4. 화성기위의 실패와 악플러의 재교육

 
순자 철학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교육과 '례'를 통해 선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화성기위(化性起僞)'입니다. 인간은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교정하고, 선한 행위를 습관화하여 '선함'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악플러들의 행태는 디지털 공간에서 '화성기위'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사회화된 '선한'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 온라인에서는 '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위'(인위적으로 획득한 선함)가 디지털 환경의 특성 앞에서 쉽게 무너져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악플러들을 단순히 처벌하는 것을 넘어, 순자의 '화성기위' 관점에서 보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교육'입니다. 이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례'를 새롭게 확립하고, 인간의 욕망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온라인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디지털 시민의식'을 함양하고, 익명성 뒤에 숨겨진 책임감을 일깨우며, 비판과 비난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순자라면 악플러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대들은 '례'를 배우고 익혀야 할지니, 익명의 가면 뒤에서도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면, 비로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로다!"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악플러들의 공격적인 행동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순자의 관점에서 '례'의 부재와 '화성기위'의 실패라는 사회적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플랫폼 기업의 책임감 있는 운영, 정부의 제도적 노력, 그리고 시민 사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디지털 례'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악'한 본성을 '선'한 행위로 전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악플러 현상은 순자의 '화성기위'가 디지털 시대에 직면한 새로운 도전 과제이자, 인간 본성의 악함을 인정하고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현대인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해학적이면서도 진지하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