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음에 이르는 병'과 현대적 불안: 실존적 절망의 본질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 존재의 핵심을 '절망'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헤친다. 여기서 절망은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실패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절망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자기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과 "자기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될 수 없는 절망"으로 나눈다. 이 절망은 죽음처럼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식시키는 병이다.
현대 사회, 특히 팬데믹과 사회적 거리 두기 이후, 우리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적 절망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거리두기는 물리적 단절을 넘어서 심리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개인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오롯이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이 과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불안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기존의 사회적 역할, 관계, 일상이 붕괴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부상했다. 키에르케고르가 '자기 자신을 상실한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존재로 본 것처럼, 현대인은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외부와의 연결을 잃고, 스스로의 존재를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그 절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인간의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2. 사회적 거리 두기와 '자기 상실':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현대적 적용
사회적 거리 두기는 단순히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한 물리적 조치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중 하나인 '타자와의 관계성'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며,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확립해 간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 앞에 선 자신'이라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 구조를 왜곡시켰다. 사람들은 타인과 자연스러운 소통을 잃고, 스스로를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기 상실'을 가속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남에게 환심을 사려하고, 세상의 흐름에 따라 변덕스럽게 살아간다"고 했다. 거리두기 시대의 인간은 사회적 인정이나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지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점점 더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SNS 속에서 타인의 삶을 엿보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습관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타자 부재의 공허함을 외부의 자극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상태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내부 깊숙이 퍼진 증거다. 현대인은 거리두기의 고립 속에서 자신과 타인 사이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자기 존재를 잃고 만다. 절망은 침묵 속에서 자라고,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다.
3. 외적 거리두기와 내적 거리두기: 현대적 소외의 심화
사회적 거리 두기는 단순히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를 두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도 깊은 균열과 거리를 만들어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실존적 존재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 즉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팬데믹 기간 우리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점점 멀어지는 경험을 했다.
많은 이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 초기에는 "이제야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다", "자기 계발의 기회다"라고 말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기대는 무력함과 피로 속에 침몰해 갔다.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은 오히려 불안과 무의미를 불러왔고,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하는 무기력 상태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처럼 ‘가능성에 사로잡힌 절망’을 인간 실존의 가장 위험한 함정 중 하나로 지적했다. 그는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질 때 깊은 절망에 빠진다고 보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고립은 바로 이런 가능성의 역설을 극대화시켰다. 우리는 시간과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 계획했던 독서, 운동, 공부, 취미 생활은 실제로는 지속되지 못하고, 점점 무기력과 자기 회의에 잠식되었다. 이처럼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표와 열망과도 멀어지는 경험은, 키에르케고르가 경고한 ‘내적 거리두기’의 현대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위기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뿌리 깊은 소외와 자기 상실이라는 점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있다.
4. '신 앞에 선 인간'의 복원: 절망을 넘어서는 길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은 인간이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절망을 통해 인간은 '신 앞에 선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진정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외부의 기준이나 타인의 평가를 넘어, 자기 자신의 내면적 기준과 가치에 의해 존재를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팬데믹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외부 세계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다시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예전처럼 인간관계, 직업적 지위, 사회적 인정에만 의존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고립과 침묵 속에서 더 절실해졌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그 절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도피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껴안고 그 안에서 진정한 실존을 찾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다.
‘신 앞에 선 인간’이란, 다른 누구의 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 앞에 진실하게 서는 인간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개념을 자기 성찰과 주체적 삶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제한 고립은 우리에게 외부의 소음 없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기회를 제공했다. 비록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불안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외부 인정이 아닌 자기 내면의 기준에 따라 삶을 설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속에서도 오직 신 앞에 서야 한다"고 했다. 현대인에게 이 말은 "절망 속에서도 자기 존재의 근원과 대면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팬데믹이라는 절망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오히려 더 단단하고 진실한 자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은 외적 복귀가 아니라, 내적 실존의 복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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