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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을 읽고 ‘가족’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다 1. 관계의 시작 - 피가 아닌 선택으로 맺어진 가족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묻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모모는 부모 없이 자란 고아이며, 그의 법적 보호자인 로자 아줌마는 과거 창녀였던 유대인 노파다. 이 두 인물은 혈연도, 법적 가족도, 같은 민족도 아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들이 나누는 관계 안에서 전통적 가족보다도 더 깊고 단단한 유대를 목격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족이 된 이유가 '피'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점이다. 서로를 돌보려는 마음,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순간을 나누는 일상이 이들을 가족으로 만들어간다. 로자는 모모에게 "엄마"가 되려 하지.. 2025. 4. 10.
'오이디푸스 왕'과 DNA 검사 시대의 운명 1. 신탁과 유전자 - 고대의 예언과 현대의 유전자 정보는 무엇이 닮았는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가, 혹은 우리가 그것을 피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떠나지만, 결국 그 예언은 정교하게 실현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운명을 피하고자 한 행동들이, 오히려 예언을 성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 DNA 검사와 유전 정보 해석의 시대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현대의 유전자 검사는 예언자보다 더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특정 질병에 걸릴 확률, 내 체질적 성향, 심지어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의 위험.. 2025. 4. 10.
괴테의 "파우스트"와 스타트업 창업가의 욕망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욕망 - 파우스트 박사의 문제의식과 창업가의 집착 괴테의 『파우스트』는 단순한 고전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디까지 성장과 성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실존적 질문의 집합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의학, 철학, 신학 등 모든 학문을 섭렵한 지식인이다. 하지만 그는 지식이 주는 만족에 한계를 느끼고, 결국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으며 경험, 쾌락, 힘을 좇는 삶에 돌입한다. 그의 고뇌는 오늘날의 스타트업 창업가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현대의 창업가는 단순히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다. 그들에게 현실은 늘 부족하며, ‘성공’이라는 개념조차 경계 너머에 놓여 있다. 지식에 대한 열망은 곧 통제와 확.. 2025. 4. 10.
햄릿은 왜 매일 우울했을까 – 현대인의 선택장애와 고전에 대하여 1. 선택 앞의 인간 – 햄릿이 ‘행동’ 대신 ‘망설임’을 택한 이유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선택의 기로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때론 자기 파괴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리극의 정수다. 햄릿은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 클로디어스를 처단해야 한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현하기까지는 끊임없는 사유와 감정적 요동, 도덕적 갈등에 휩싸인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라는 문장 하나로, 인간 존재의 핵심인 자유의지와 운명,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날카롭게 묻는다. 그가 우울했던 이유는 단순히 사랑과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내포한 철학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햄릿.. 2025. 4. 9.
군주론으로 본 오늘의 정치 유튜버 전략 1. 마키아벨리와 정치 유튜버 –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이 논리는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에 있어 도덕보다 실용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가 주장한 핵심은 ‘권력은 선한 것이 아닌, 효과적인 것’이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였다. 흥미롭게도 이 논리는 오늘날 정치 유튜버들의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들은 여론을 조작하거나 진실을 왜곡하려는 악의적 의도 없이도, 단지 시선을 끌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두려움’과 ‘충격’을 도구로 사용한다. 분노를 유발하고, 적을 설정하며, 갈등을 과장하는 콘텐츠는 시청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반복적인 소비를 유도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때로.. 2025. 4. 9.
노자를 읽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진 이유 1. 무위(無爲)의 철학 – ‘하지 않음’이 왜 이렇게 매력적인가노자는 『도덕경』 서두에서 말한다. “도(道)는 말로 할 수 없으며,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상태는 인간의 억지와 욕망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철학적 통찰이다. 이처럼 노자의 사상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인위적인 개입 없이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현대 직장 문화는 그와 정반대의 철학 위에 놓여 있다. 일상은 쉴 틈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하고, 구성원은 KPI와 OKR이라는 이름의 숫자들에 따라 움직인다. 창의성은 보고서 안에 갇히고, 자율성은 팀장 결재에 종속된다. 노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과도한 행위’를 숭.. 2025.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