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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데카메론'과 전염병 시대의 밈(meme): 바이러스보다 빠른 이야기

by lee-niceguy 2025. 5. 20.

1. '데카메론'의 프레임: 검열 대신 농담이 살아남았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덮쳤을 때 사람들은 절망과 공포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는 전염병을 피해 피렌체 외곽 별장에 모인 10명의 청년 남녀가 열흘간 매일 한 편씩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구조의 이야기 집, '데카메론'을 완성한다. 이들은 현실의 참혹함을 잠시 잊기 위해, 사랑과 욕망, 지혜와 기지, 실수와 용서를 주제로 총 100편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중요한 건, 이 이야기들이 단순한 시간 때우기나 위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자, 검열보다 빠르게 퍼지는 사회적 대화 방식이었다.
 
'데카메론'은 단순한 고전 문학이 아니라, ‘이야기의 바이러스적 전파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염병이 확산되며 공식적인 종교적 담론과 권위는 흔들렸지만, 개인이 구전하고 나눈 이야기는 살아남았다. 이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밈(meme)’의 시대와도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각종 사회적 이슈와 사건들이 순식간에 패러디되고, 패러디는 다시 누군가의 ‘반응형 스토리’로 변주된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가 아닌 형식과 리듬, 유머로 위기를 견디는 법을 익히고 있다. 보카치오의 10인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죽음을 유예하듯, 우리는 인터넷 밈을 나누며 불안을 유예하고 있는 셈이다.
 

2. 밈(meme)이라는 새로운 언어: 감염보다 빠른 웃음의 구조

 
오늘날 밈(meme)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제안한 밈은 “문화의 유전자”로, 생각이나 행동, 스타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성 있게 복제되고 변형되는 정보 단위를 뜻했다. 이 정의는 디지털 시대에 와서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밈은 짧은 문장, 짤방, 패러디 영상, 심지어 음성 합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사람들의 감정을 순식간에 붙잡고 퍼져 나간다. 특히 전염병이라는 공통 경험이 전 세계를 지배하던 팬데믹 시대, 밈은 실제 바이러스보다 빠른 속도로 감정을 전달하고 집단 정서를 재구성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코로나19 초기, 공포와 혼란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사람들은 정부의 브리핑보다 먼저, “화장지 사재기 짤”을 공유했다. 텅 빈 마트 선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밈은 단 몇 시간 만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타임라인을 점령했다. 이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지금 너도 나처럼 불안하지?”라는 정서적 신호이자 공감의 암호였다. 사람들은 그 암호를 복제하고 변형하며, 서로를 ‘같은 상황 안의 생존자’로 인정했다. 밈은 감정의 공명 구조로 작동하며, 언어보다 빠르게 감염되고, 정치보다 유연하게 퍼졌다.
 
이런 밈의 전파 구조는 '데카메론'이 전염병 한복판에서 선택한 ‘이야기하기’라는 생존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야기꾼 10인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무겁고 직접적인 현실을 피하면서도, 그 안에서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종교적 금기, 권력자 풍자, 성적 일탈 같은 민감한 주제를 농담과 에피소드로 가볍게 풀어낸다. 흑사병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이들이 선택한 도구는 법령이나 경고문이 아니라, 실소를 유발하는 짧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데카메론'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한 신부가 금욕을 설파하면서도 몰래 여인을 유혹하려다 되려 자신이 놀림감이 된다. 이 이야기는 당대 종교 권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오늘날 밈의 문법으로 보자면 “말은 그렇게 해놓고 행동은 정반대” 밈의 원형과 닮아 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에도 구술로 빠르게 퍼졌고, 청중은 즉각 반응하고 재생산했다. 이는 정확히 오늘날 SNS상에서의 밈 소비 구조와 일치한다. 밈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사회적 위선에 대한 반사적 반응, 위기 상황에 대한 창의적 해소 방식이며, '데카메론'은 그 전형적 사례다.
 
이처럼 '데카메론'과 밈은 모두 위기 속에서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죽음을 가시화하는 뉴스보다, 실소를 유도하는 이야기나 이미지는 훨씬 빠르고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야기는 진지한 체하지 않았고, 밈은 무심한 듯 가볍게 퍼졌지만, 그 안에는 공포를 웃음으로 바꾸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밈은 바이러스보다 빠르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감정에 닿는다. '데카메론'이 이야기를 통해 유럽의 무너진 질서를 잠시나마 지탱했듯, 오늘날의 밈은 불안정한 시대의 인간관계를 재조율하는 감정적 방역 시스템인 셈이다.
 

'데카메론'과 전염병 시대의 밈(meme): 바이러스보다 빠른 이야기

 

3. 밈과 이야기의 생존력: 콘텐츠가 살아남는 방식

 
밈은 시대를 관통하는 감정의 편집 기술이다. 그 힘은 즉흥성과 반복 가능성에 있다. 하나의 밈이 유행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간단하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미지 하나, 대사 한 줄, 특정 음성 클립, 그 어떤 것이든 반복 가능하고, 상황에 맞게 변형될 수 있다면 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은 중세의 이야기꾼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구성할 때 각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지 않고도, 각각이 독립적으로 소비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즉, 자체 복제 가능한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데카메론' 속 이야기들은 마치 밈처럼 코드화된 교훈 혹은 풍자를 품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위선”을 다루고, 또 어떤 이야기는 “지혜로운 하인의 기지” 혹은 “사랑의 기적”을 테마로 한다.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범용적 이야기 요소이며, 그래서 후대 작가들이 '데카메론'을 변형하거나 각색하기에 용이했다.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차이콥스키까지 이 작품의 일부 에피소드를 자신들의 창작물에 인용하거나 구조를 차용했다. 즉, '데카메론'은 중세 판 밈의 아카이브이자 재가공 가능한 내러티브의 풀(pool)이었다.
 
현대의 밈도 이와 같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언제든 다른 맥락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스터브드 어프리카 키드(Distracted Boyfriend Meme)’는 원래 연애 상황을 풍자한 이미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자 심리, 정치적 무관심, 코로나 시국의 자제 실패 등 다양한 이슈에 차용되었다. 밈은 생존한다. 왜냐하면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집단적 공감을 건드릴 수 있는 장치를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메론'이 유행어처럼 인용되며 시대마다 다른 해석을 낳았듯, 밈도 끊임없이 복제와 변형을 통해 살아남는다.
 
무엇보다 밈과 이야기의 공통된 생존 전략은 ‘감정적 연결’을 우선순위로 둔다는 점이다.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순간적인 몰입과 정서적 반응을 먼저 불러일으킨다. '데카메론'의 이야기들은 짧고 유쾌하며, 교훈적이되 절대 무겁지 않다. 이 점이 중세 유럽을 넘어, 21세기 전염병 시대의 우리가 다시 이 책을 펼치게 만든 이유다. 마찬가지로 밈도 “가볍고 웃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를 해석하는 하나의 창”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진지한 메시지를 비 진지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탁월한 수단이며, 이는 이야기와 웃음의 생존 전략이자 저항 방식이다.
 

4.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이야기: 다시, 데카메론으로 돌아가다

 
전염병은 끝났지만, 그 흔적은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데카메론'은 다시 읽히고 있다. 팬데믹 당시 수많은 출판사가 이 고전을 재출간했고, 수많은 비평가가 ‘이야기의 힘’에 주목했다. 왜일까? 사람들은 불안한 현실 앞에서 논리나 명령이 아닌, 이야기로 위로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밈이 한순간의 웃음을 제공한다면, '데카메론'은 그 밈이 가지는 구조를 천천히 풀어내는 서사적 밑그림이 된다.
 
우리는 이제 밈을 단지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직접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텍스트 하나, 이미지 하나, 영상 하나가 세계로 뻗어 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이런 순환 속에서 '데카메론'은 새로운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플랫폼이다. 보카치오가 이야기로 질병을 멈추려 했듯, 우리는 밈으로 무기력을 웃음으로 바꾸려 한다. 이야기의 본질은 위로가 아니라 전염이고, 복제이며, 연결이다.
 
'데카메론'과 밈, 고전과 디지털, 구술과 짤방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좁다. 결국 모두가 묻는 질문은 같다. “우리가 무너질 때, 무엇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답은 아마도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만들고 있을 또 하나의 밈 속에, 그리고 오래전 이야기꾼들이 나눈 농담 속에 있다. 우리가 살아남은 방식은 언제나 같았다. 죽음보다 빠르게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 그리고 웃음으로, 일상을 다시 조립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