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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변신' 속 그레고르를 자취방 알바생으로 바꿔보면

by lee-niceguy 2025. 4. 19.

1. 존재의 전환 - 벌레가 아닌 ‘사회적 투명 인간’이 된 청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한 청년이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외판원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성실한 인물이지만, 갑작스러운 변신 이후에는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히며 가족에게조차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는 사회의 톱니바퀴처럼 기능하던 인간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잔여물’로 추락한다. 이 이야기 속의 ‘벌레’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지위를 위협받는 사회적 전락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만약 그레고르가 오늘날의 청년이었다면, 그는 서울 외곽의 반지하 자취방에 홀로 살며, 편의점 야간 알바와 배달 대행 일을 번갈아 가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의 ‘변신’은 외모나 육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는 순간’ 갑작스럽게 사회에서 투명 인간이 되는 감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어제까지는 근무표에 이름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알람이 울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불려지지 않으며,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기분. 이러한 급격한 소외감은 현대 청년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경험이다.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변신’은 실제로 그렇게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온다. 등록금 대출로 인한 채무 압박, 계약직의 불안정한 노동 환경, 취업 실패와 반복되는 면접 탈락, 반복되는 비정규직 전전은 그들을 점점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밀어낸다. 출근도, 소속도, 명확한 역할도 없이 고립된 공간 속에서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일상에 파묻히다 보면, 자존감은 무기력으로 침몰하고,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레고르가 침대 위에서 아무 말 없이 벌레의 몸을 받아들였듯, 오늘날의 자취방 청년도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

 

'변신' 속 그레고르를 자취방 알바생으로 바꿔보면

 

2. 일상의 붕괴 - ‘일할 수 없음’이 아닌 ‘쓸모없음’의 공포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뒤에도 가장 먼저 ‘출근을 못 하게 됐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생존보다도 직무 책임, 건강보다도 사회적 의무를 먼저 떠올리는 그의 반응은 20세기 초 노동 중심 사회의 전형적인 의식을 반영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청년 노동자들의 내면 풍경이기도 하다. 현대의 알바생들은 단지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나는 아직 괜찮다’는 신호를 사회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서 배제되었을 때, 이들은 생계의 위기뿐만 아니라 존재 의미의 붕괴를 경험한다.

 

예컨대, 오늘날의 자취방 알바생은 몸이 아파 근무에 빠진 날, 죄책감과 불안에 휩싸인다. 대체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점장이 보낸 불쾌한 메시지를 읽고, 이튿날 근무표에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그는 단순히 알바를 잃은 것이 아니라 ‘쓸모없어진 인간’으로 스스로를 낙인찍는다. 이러한 자가 낙인은 단기 고용과 비정규직 노동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내면화되며, 자존감과 자아 정체성에 깊은 손상을 남긴다.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벌레처럼 뒤척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은, 실상 현대 청년들이 자취방에 누워 휴대폰 속 공고만을 바라보며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와 똑같다. 이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스마트폰과 배달 앱 사이에서 허무하게 보내고, 이력서를 열 번 넘게 수정해도 답장이 오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진다. 그들의 ‘변신’은 사회가 부여하는 쓸모의 기준에서 미끄러질 때 발생하며, 이는 단순한 노동력의 상실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관계로부터의 존재적 퇴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3. 가족의 시선 - 생계 책임자에서 짐으로의 전락

 

카프카의 '변신'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은 그레고르의 육체적 변신보다, 가족의 시선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처음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바라보는 가족은 당황과 공포를 넘어 애처로움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차 가족의 일상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겨지고, 결국엔 혐오와 분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조차도, 구성원이 ‘쓸모’를 잃는 순간 그 존재를 축소하거나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심리적 충격을 안긴다. 이 구조는 오늘날 가족 부양형 청년 가구에서도 유사하게 재현된다. 수많은 청년이 여전히 학비나 생활비, 부모의 생계까지 보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들이 일을 멈추는 순간 느끼는 압박은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 내 역할 붕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현대판 그레고르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배달과 편의점 근무를 반복하며 월세와 공과금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 혹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탈진으로 수입이 끊긴다면? 가족의 반응은 카프카의 소설과 놀랍도록 닮아간다. 처음엔 걱정하지만, 금세 경제적 부담이라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고, 때로는 “그래도 건강한데 왜 일하지 않느냐”는 말을 던지며 은근한 질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가족은 더 이상 그를 독립된 성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시 돌봄의 대상, 혹은 불편한 책임으로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관계가 ‘기여’와 ‘효용’이라는 기준으로 조건화된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카프카가 그레고르를 ‘벌레’로 바꾼 이유는, 그가 생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순간, 가족이라는 울타리마저 그를 보호하지 못할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늘날 자취 청년들이 실직하거나 일시적 실패를 겪었을 때 맞닥뜨리는 현실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가 무너지면 끝이구나”라는 절망을 경험하고, 가족조차 완전한 안전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이렇듯 가족 내 역할 기반 관계가 무너지면, 청년은 더 큰 고립과 자기 의심에 빠진다. 일에서 밀려난 동시에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존재 이유를 상실한 이들은,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고, 자취방 안에서 고립된 일상을 반복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정서적 소외가 아니라, 사회 전체로부터의 이중 배제이며, 카프카적 ‘변신’의 핵심 공포가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4. 카프카적 결말 - 죽음이 아닌 ‘소멸된 존재’로 기억되다

 

'변신'의 결말은 더욱 처절하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점차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된다. 가족과의 접촉은 완전히 단절되고, 어느 날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 죽음을 둘러싼 분위기는 비극이 아닌 해방처럼 묘사된다.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외출 계획을 세우고, 그의 부재가 곧 생활의 회복과 안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 장면은 카프카 문학 특유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동시에, ‘죽음조차 애도받지 못하는 존재’가 얼마나 처연하고 무서운가를 말해준다.

 

만약 그레고르가 오늘날의 자취방 청년이었다면 그 결말은 더욱 비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알바 일정이 끊긴 채 연락이 두절되고, 월세가 밀려 문이 강제로 열리는 날에야 주변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흔적은 배달 앱의 로그아웃, 편의점 CCTV에 찍힌 흐릿한 장면, 은행 어플에 남은 마지막 2,340원의 잔액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의 삶을 애도하지 않으며, SNS 친구 목록에서도 조용히 사라져간다. 그의 죽음은 죽음조차 아닌, 기억되지 않는 소멸로 기록된다.

 

카프카가 ‘변신’을 통해 말한 공포는 ‘벌레가 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완전히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않는 인간의 비극이다. 현대의 자취 청년들도 가끔 자신이 없어진다면, 누가 이 부재를 감지해 줄까를 자문한다. 가족은 바쁘고, 친구는 뜸해졌으며, 사회는 수치를 기반으로 기록만을 남긴다. 결국 이들은 점점 기록되지 않고, 불리워지지 않으며, 기억되지 않는 삶의 형식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의 그레고르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니?” 그리고 동시에 사회도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존재 자체로 기억하고 있는가?” 존재는 쓰임보다 먼저다. 카프카가 보여준 ‘변신’은 단지 비극의 문학이 아니라, 존재가 존중받을 수 없는 시대에 대한 경고문이자, 우리 모두가 놓치기 쉬운 인간 존엄의 회복을 촉구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오늘 자취방에 홀로 앉아 있는 청년에게도 깊이 울려 퍼진다.